●感恩寺址★용인개명★용인궁합★용인택일★동백택일★동백궁합★용인사주★해인동양철학원●
현 소재지 : 慶州市 양북면 용당리 55-1 (26,807㎡) 통일신라시대 감은사지 터 龍雙齒 象徵 塔 전경(아래 사진)
감은사지(感恩寺址)는 사적 제31호이다. 統一新羅 文武大王은 삼국통일을 이룬 후 나라를 더욱 굳게 지키기 위해 감은사를 짓기 시작했으며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이 아버지 문무왕(文武王)의 뜻을 받들어 즉위한 이듬해(682)에 완공하고 감은사(感恩寺)라고 불렀다.
이 절터는 1959년 발굴조사에 의하면 중문(中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기단석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초석이 놓인 자리만 확인되고, 금당(金堂)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기단은 이중기단이다. 북쪽에는 기단석과 계단석이 남아 있다. 금당의 바닥은 방형 받침돌을 이중으로 놓아 위쪽 받침돌 위에 장대석을 걸쳐놓았고 그 위에 큰 장대석을 직각으로 마치 마루를 깔 듯이 깔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았다. 이 마루 장대석 밑은 공간이 된 특수한 구조로 다른 예가 없는 것으로 보아 동해의 용(龍)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한 것 같다. 강당지(講堂址)는 정면 8칸 측면 4칸으로 일부만 발굴되어 기단석과 초석들이 거의 완전하게 지하에 보존되어 있다. 회랑(回廊)은 강당의 정면어간(正面御間)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 사지는 쌍탑식 가람으로 창건연대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석탑 역시 한국 석탑의 대종을 이루는 신라양식의 석탑 중 양식적인 완성을 보이는 가장 오랜 것이다.
1959년과 1997년의 동·서탑 해체 수리 때 삼 층 탑신에 마련된 사리공(舍利孔) 속에 당대를 대표하는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어 신라의 금속조각이 성당(盛唐)을 능가하고 있다. 현재 중문지(中門址), 회랑지(回廊址), 남반(南半) 및 금당지(金堂址) 대부분이 밭이 되었고, 회랑지 북반과 강당지(講堂址)는 민가에 있다. 동서로 두 탑을 세우고 이 두 석탑 사이의 중심을 지나는 남북 선상에 중문과 금당, 강당을 세운 형태이다. 중문은 석탑의 남쪽에, 금당과 강당은 석탑의 북쪽에 위치한다. 회랑은 남·동·서 회랑이 확인되었고, 금당 좌우에는 동·서 회랑과 연결되는 주회랑이 있다. 이는 불국사에서도 볼 수 있는 형식이다. 또한 중문의 남쪽으로 정교하게 쌓은 석축이 있으며, 이 석축의 바깥으로는 현재 못이 하나 남아 있다. 이를 용담이라 부르는데, 감은사가 대종 천변에 세워졌고 또 동해의 용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 못이 대종천과 연결되어 있고, 또 금당의 마루 밑 공간과도 연결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금당터 주변에는 석재들이 흩어져 있다. 금당터 앞의 석재 중에는 태극무늬와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것이 눈에 띄는데 일반돌은 아니고 금당이나 다른 건물에 쓰였던 석재로 추측된다.
풍수지리학문 관련 보충 설명 : 이 절(感恩社)은 보통 절이 아니다. 당시 동해 남부 해안가를 침략하며 발호하던 왜적의 우환을 차단하려는 문무대왕의 의지가 담긴 풍수지리학적인 비보사찰로 두 탑신이 바로 문무대왕 해중릉을 보호하는 龍齒(용의 이빨) 형상이다. 당 사찰의 폐허와 풍수지리 학문적으로 상관될 수도 있을지도 모를 사건 즉, 일천 년 후 이 땅의 韓民族이 국가를 빼앗기는 천추의 恨이 된 치욕! 즉, 경술국치가 발생했다. 海印은 장차 일 갑자 내(일순 중)에 이루어질 통일 대한민국을 대비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창건한 당 사찰의 大重創을 천지신명님께 간절하게 축수 念願하는 바다. 끝.
海印導師. 合掌.
#중성적이름, #남자아기이름, #여자아기이름, #남자아이이름, #여자아이이름, #신생아재개명, #용인궁합, #용인이사택일, #용인결혼택일, #용인개업택일, #용인개명작명, #용인재개명.
블라인더 처리된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