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계 설파●해인동양철학원●택일●사주●작명●개명●재개명●동백동개명작명●
제 1계 : 하늘을 속이고 바다를 건너다.
제 2계 : 위나라를 둘러싸고 조나라를 구하다.
제 3계 : 타인의 칼을 빌려서 사람을 죽이다.
제 4계 : 적이 지칠때까지 편하게 기다린다.
제 5계 : 불난 틈을 타서 도적질한다.
제 6계 : 동쪽에서 고함을 치고 서쪽을 쳐서 취하라.
제 7계 : 없는 속에서 생이 있다.
제 8계 : 적 몰래 진창을 건너가다.
제 9계 : 강 건너 불은 구경만 하라.
제 10계 : 웃음 뒤에 칼을 숨기다.
제 11계 : 자두나무가 복숭아나무 대신 쓰러진다.
제 12계 : 손길에 순응하여 양을 끈다.
제 13계 : 풀밭은 쳐서 뱀을 놀라게 한다.
제 14계 : 시체를 빌려서 혼백을 돌려준다.
제 15계 : 호랑이를 꾀어내서 산을 떠나게 한다.
제 16계 : 사로잡고 싶으면 일단 놓아 줘라.
제 17계 : 돌을 미끼로 금옥을 끌어낸다.
제 18계 : 적을 이기려면 적왕을 사로 잡으라.
제 19계 : 솥 밑에서 장작을 꺼낸다.
제 20계 : 물을 휘저어 혼란한 틈에 물고기를 건진다.
제 21계 : 금매미가 허물 겁데기를 벗다.
제 22계 : 문을 걸어 잠그고 도적을 잡는다.
제 23계 : 먼 곳을 사귀고, 가까운 곳은 공격해서 취하라.
제 24계 : 길을 빌려서 괵나라를 치다.
제 25계 : 대들보를 훔쳐서 기둥으로 바꾼다.
제 26계 : 뽕나무 대신 회화나무를 욕한다.
제 27계 : 어리석은 체 하면서도 미치지는 않는다.
제 28계 : 지붕에 올려놓고 사다리를 치워버린다.
제 29계 : 나무 위에 꽃을 피운다.
제 30계 : 손님이 주인으로 바뀐다.
제 31계 : 미인계를 잘 이용하라.
제 32계 : 성을 비운 것 처럼 보이는 계략을 쓰라.
제 33계 : 각종 스파이를 장기적으로 최대한 이용하라.
제 34계 : 스파이에게 자상을 주어 진짜처럼 믿게하라.
제 35계 : 내부와 외부 이중 작전을 구사하라.
제 36계 : 최선을 다했음에도 적과의 전쟁 등에서 敗色이 짙으면 일단 살아 남기위해 도망이 최상책이다. 일단, 살아 남아야만, 복수와 재기의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海印導師. 合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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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35계는 다 빼먹고서리~~~그저 토끼는(급히 도망가는) 줄행랑이라고 알았다라고라~~~ㅋㅎㅎ~~~
그렇지만 오늘은 36계의 정확한 역사에 대해서 학술적으로 몇마디 說破하려고 작정중이다.
당 <36계 병법서적>은 중일전쟁 중이던 1941년도에 발견되었고, 제 1판이 인쇄된 곳이 중공의 문화혁명이 한참이던 기미년(1979년)이었다.
기원전 6~7세기부터 이책이 편집되었다고 추론할진대, 약 1,500년전까지, 실로 1,000년이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이 생각하고 실제 생활과 전쟁 등을 겪으면서 지혜를 짜내서 만들어낸 당면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기술한 내용 습득은, 최선의 생존기술 습득방법의 선택이라고 말해도 모자람이 없다.
즉, 각종 생존과 <我와 非我의 鬪爭>현장인 생활속에서 지혜, 잠언, 교훈, 책략과 모사, 혹은 인간의 비정한 냉혹성, 잔인성, 비가치성 등 모든 생존의 모양새를 집대성하여 축적한 서적이라고 말해도 과히 모자라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生存하기 위한 각종기술의 凝縮과 集結板>이라 표현해도 모자람이 없는 책이다. 다만, 한 때 偏狹한 者들에 의해서 雜書로 分類되었지만, 인간의 역사속에서 역시 필요에 의한 能手能爛한 計策으로 認定된지라 다시 세상에 드러내서 光明을 보게 되었다.~~~흠~~~
海印導師. 合掌.
춘추전국시대란 동주시대(東周時代)의 다른 이름이다. BC 770~403년은 공자가 편찬한 노(魯)나라의 편년체 사서 <춘추(春秋)>의 이름을 따서 춘추시대라 하고, BC 403~221년은 대국들이 패자의 자리를 놓고 다투었으므로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 한다.
춘추시대 BC 770~403
주(周) 왕실이 동천하고 세력이 약해지자 100여 개국이 넘는 중원(中原) 지방의 제후들이 반독립적인 상태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이 나라들은 서주(西周) 시대 이래 존재하던 읍제국가(邑制國家)가 발전한 것이었다. 이들은 국도(國都)의 세력권 내에 크고 작은 읍들을 복속시켰는데, 국도의 정치력이 쇠약해지면 곧 제후의 이합집산이 격심하게 되고, 제후세력은 급속히 약해졌다. 그래서 춘추 제후는 국도에서 정권을 확립하고 여러 읍의 맹주라는 입장을 확고히 하는 데 노력했다. 이렇게 성립된 제후는 다시 회맹(會盟) 외교를 통해 상호간의 세력과 균형을 도모했다.
허약해진 주 왕실을 대신하여 제후국 가운데 강자를 중심으로 여러 국가들이 회맹을 하게 된 데에는 남방의 강국인 초(楚)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작용했다. BC 658년 초가 정(鄭)을 침입했을 때 제(齊)의 환공(桓公)이 이듬해 제후들을 이끌고 초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으며, 그 여세를 몰아 제후들과 규구(葵邱:지금의 허난 성 란카오 현[蘭考縣])에서 회맹하여 패업을 성취했다.
환공이 죽은 후 제는 내분으로 쇠약해지고 그 뒤를 이어 진(晉)의 문공(文公)이 중원의 맹주가 되었다. 그는 BC 633년 북진해온 초를 성복(城濮 : 지금의 산둥 성 쥐안청[鄄城])에서 대파하고, 돌아오는 길에 천토(踐土:지금의 허난 성 정저우[鄭州] 동북쪽)에서 제후들을 모아 회맹했다. 문공이 죽은 후 진이 내분으로 세력이 약해지자 초가 다시 진(陳)과 함께 송을 침입했고, 나아가 육혼(陸渾:지금의 간쑤[甘肅], 산시[陝西] 서부에 속함)의 융(戎)을 치고 낙(지금의 허난 성 뤄양)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초의 장왕(莊王)이 주 왕실의 상징인 보정(寶鼎)의 경중(輕重)을 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양쯔 강 유역에서 세력을 쌓아 북방의 패자가 된 초를 위협한 것은 춘추 후기에 세력을 키워 급성장한 오(吳)나라였다. 오왕 합려(閤閭)는 BC 506년초의 도읍인 영(지금의 후베이 성 장링 현)을 함락시키고 BC 482년 맹주의 지위에 올랐다. 그후 오는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으며 월은 다시 초에게 패자의 자리를 빼앗겼다.
전국시대 BC 403~221
춘추시대 초기에 200여 개가 되던 제후국은 말기에 이르러 10여 개국으로 감소했다. 이 시기를 전국시대라고 부른다. 각 제후국 내에서는 실력을 키운 일부 세경(世卿)이 독자적인 가계(家系)를 형성했다. BC 5세기말경 제에서는 진항(陳恒)이 간공(簡公)을 살해하고 실권을 장악했으며, 진(晉)에서는 한(韓)·위(魏)·조(趙)의 3씨(氏)가 구요(苟瑤)를 멸망시키고 국가를 3분했다. 이때 중국에는 제(齊)·연(燕)·진(秦)·초(楚)·한(韓)·위(魏)·조(趙)의 7개 국가가 큰 세력을 형성하고 서로 패권을 다투었다.
이 전국 7웅(七雄) 가운데 가장 먼저 발전한 나라는 위였다. 위의 문후(文侯)는 이회(李悝)와 서문표(西文豹)를 등용하여 농업생산력을 증진시키는 한편, 오기(吳起)·악양(樂羊) 등의 장군을 기용하여 영토를 확대했다. 그러나 상앙(商鞅)의 변법을 통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급속히 강국으로 부상한 진(秦)의 공격을 받아 BC 340년 수도를 안읍(安邑:지금의 산시 성[山西省] 샤 현[夏縣])에서 대량(大梁:지금의 허난 성 카이펑 시[開封市])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진이 강성해지자 BC 318년초의 회왕(懷王)은 진 동쪽의 위·조·한·연·제와 함께 남북으로 동맹하는 합종책(合從策)으로 진에 대항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진은 6국 각각과 동맹하는 연횡책[連橫策]을 써서 합종을 방해하고 계속적인 침략으로 여러 중원 국가들 가운데 우위를 차지했다. 진은 BC 260년 장평(長平) 싸움에서 조를 이겨 조의 세력을 약화시킨 뒤 연합한 초·조·한·위의 마지막 저항도 물리치고, BC 221년 중국 전역을 통일했다.
농업과 상공업의 발전
춘추시대 이래 중국에서는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다른 문명과 달리 단철보다는 주철이 먼저 일반화되었는데 무기로 적당하지 않은 주철은 주로 농기구로 사용되었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과 전국시대 이후 우경(牛耕)의 출현은 농업생산력을 현저히 증대시켰다. 또한 수리관개 시설의 발달로 경지가 확대되었다. 이것은 농민의 이주를 촉진시켜 세수(稅收)를 증진시키려는 목적 외에도, 전통적인 공동체 안에서의 농민을 포함한 전토지와 백성을 국가가 장악하려는 새로운 경제정책이기도 했다.
농업의 발전과 함께 상공업 분야에서도 두드러진 변화가 있었다. 이 시기에 제철업·제염업·상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대상인들의 이야기도 전해지며, 민간수공업자나 중소 상인들의 활동도 활발했다. 상공업의 발달로 도시발전이 촉진되어 각 제후국의 수도가 상업도시로도 크게 번영했다.
제자백가 사상
춘추전국시대에는 열국이 분립하는 정치적 혼란 가운데 사상과 문화가 꽃을 피웠다. 또한 천문·역법·수리·토목·건축·공예에서도 전례 없는 발전을 보였다. 특히 예(禮)를 중심으로 한 유가사상의 성립은 주목할 만하다.
공자는 부자와 형제를 축으로 하는 가족도덕을 기본으로 하고 사회적 규율로 예를 중시했다. 또한 덕치주의에 의한 정치론을 전개했고 군신(君臣)의 의(義)를 강조했다. 그는 인(仁)의 사상을 확립하여 유교의 기본원리로 삼았다. 전국시대에 위의 문후, 제의 위왕(威王)·선왕(宣王) 때에는 유가를 비롯해 여러 사상가들도 자신의 교단을 이끌고 제후왕과 공(公)의 정치에 접근하여 세력을 확대하려 했다. 이들 교단과 그들의 저작을 총칭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한다.
이 가운데 묵가(墨家)는 공리주의(功利主義)의 입장에서 겸애(兼愛)·비공(非攻)·상동(尙同)·상현(尙賢)·천지(天志) 등의 이념을 강조하고 군권(君權) 강화를 주장했다. 유가(儒家), 특히 맹자는 천명의 지배하에 도의적 정치, 즉 왕도(王道)를 행할 것을 주장하고 인성이 본래 선함을 믿어 수양을 중시했다. 법가(法家)는 군권을 절대화하고 법(法)과 술(術)에 의해 신상필벌(信賞必罰)을 엄격히 할 것을 주장했다. 도가(道家)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를 주장했다. 이들 제자백가는 각각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고 서로 비판하면서 깊은 영향을 주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