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론 역사 기술★용인작명소★용인철학관★신생아작명★개명★궁합★해인동양철학원●
대저 풍수지리학문이란 바로, 땅을 살아 있는 생명으로 대하는 전통적인 지리과학이다. 만물이 기(氣)로 이루어졌다고 보아 만물 중의 하나인 땅도 지기(地氣)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론할진대, 지기 즉, 땅의 기운에 대해 음양오행 학문과 주역의 논리를 활용하여 체계화한 학문 분야가 바로 "풍수지리 학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에 있어 서양의 지리(geography)가 지리 학문의 영역을 차지하기 이전까지의 진정한 전통 지리는 "풍수지리 학문"이었다. 19세기까지 실학자들의 지리관과 동학과 같은 개벽 사상의 밑바탕이 되었지만 일제에 의해 迷信(미신)으로 격하되었으며, 이러한 외세에 의해 왜곡된 풍수지리가 제 모습을 찾기 전에 다시 서양의 지리학문에 의해 묻혔으며, 풍수지리는 풍수라는 봉건시대의 퇴물 정도로 버려졌다.
風水地理(풍수지리) 學問(학문)은 인간이 일찍부터 자연 속에서 삶을 영위하기 위해 터득한 지혜에 근본 바탕을 두고 있다. 특히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후부터 작물의 재배와 성장에 관계되는 땅의 성격과 분포의 차이를 기의 차이로 이해하면서 풍수지리는 이론적 토대를 이루게 되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이후 氣(기)의 變化(변화)와 動靜(동정)을 陰陽論(음양론)으로 파악하는 陰陽家(음양가)의 성장이 인간의 개별 경험적 수준에 머물던 氣(기)에 대한 인식을 학문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렸으며, 그 당시부터 각종 風水地理書(풍수지리서)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비·눈·바람 등의 기후현상, 토양, 수분, 지형, 생태계 내의 물질순환 등 모든 自然現象(자연현상)을 氣(기)의 循環(순환) 작용으로 파악했다.
현존하는 풍수지리서 중에서 최고(最古)의 것으로는 동진(東晉)의 곽박(郭璞)이 지은 〈금양경 錦襄經〉이다. 한반도에서도 일찍부터 땅에 대한 氣(기)의 인식이 발달했으나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여 학문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韓半島(한반도)는 땅에 대한 독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삼국시대 이후 중국으로부터 풍수지리가 전해 내려온 후 중국과는 다른 한반도인 방식의 고유하고 독특한 “풍수지리 학문”을 발전시켰다. 특히 고려 시대에는 우리의 독자적인 風水地理書(풍수지리서)가 제작되었다.
통일신라시대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동외산선문(桐畏山禪門)의 도선(道詵)이라는 禪僧(선승)에 의해 한반도 풍수지리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도선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비보사상(裨補思想)으로서 중국과 다른 한반도 풍수지리의 특성이다. 즉 주어진 땅의 지기에 의지에서 살 뿐만 아니라 나무를 심거나 가산(假山)을 만들고 사찰과 탑 등의 입지를 통해 積極的(적극적)으로 땅의 지기를 인간의 삶과 조화되도록 하는 것이 裨補(비보)로서 한반도 풍수지리 학문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고려 시대에는 비보 문제를 전담하는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비보와 같은 땅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는 고려 시대 풍수지리에서 地氣(지기) 衰旺(쇠왕)과 그에 따른 국도의 천도 문제를 제기하는 토대를 삼기도 했다.
조선 시대의 풍수지리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시작되었다. 고려의 도읍인 개성을 벗어나기 위해 계룡산과 모악산의 비교 분석을 통해서 결국 한양이 도읍지로 선정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건국 후에 새로운 도읍 선택에 골몰한 것은 고려 시대에 문종·숙종·예종·공민왕 등이 모두 풍수지리 논리를 고려의 政治的(정치적)인 개혁에 이용하려 했던 전통을 이은 것이라 추론할 수 있다. 결국, 風水地理(풍수지리) 學問(학문)이 발달하게 된 根本的(근본적)인 이유는 이렇다고 감히 推論(추론)한다. 즉,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政治的(정치적)으로 野望(야망)을 품은 특정 인간이 당 시대의 腐敗(부패) 狀況(상황)을 一掃(일소)하고 새로운 국가이념으로 무장하여 新生(신생)國家(국가)를 創建(창건)하면서 가장 重要(중요)한 바탕 즉, 民衆(민중)의 全幅的(전폭적)인 支持(지지)를 받기 위하여 하늘과 땅의 순환 原理(원리)와 天機(천기) 法則(법칙)에 따라서 旣存(기존) 國家(국가)를 顚覆(전복)하고 새로운 국가를 創建(창건)하는 제1의 國家(국가) 理念(이념)이 必要(필요)할진대, 소위 국가 수도로 정할 터의 衰旺論(쇠왕론)에 의한 國家(국가) 開創(개창)의 必然性(필연성)을 强調(강조)하여 民衆(민중)에게 傳播(전파)하였다고 본다.
조선 태조는 왕조의 정통성 문제를 민중의 머릿속에 깊이 뿌리내린 풍수지리를 이용해서 정면 돌파했다. 즉, 지기가 왕성한 한양에 새로운 나라를 세워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 앞날에 대한 기대를 심어주어 신생 왕조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성종 이후 문물이 안정되면서 개혁적 풍수지리의 사상성은 점차 몰락했고 좋은 터를 골라 가문과 개인의 부와 권력을 탐하는 수단으로 풍수지리를 이용함으로써 풍수지리 學問(학문)은 이기적인 묏자리와 집터 잡기 잡술로 여겨지게 되었다. 타락한 풍수지리를 비판하고 건강한 지리관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실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으나 외세의 침략으로 열매를 맺지 못한 채 풍수지리는 오늘날에도 저속한 옛 관습을 깨지 못하고 있다.
풍수지리는 기본적으로 地氣(지기)로서 이루어진 살아 있는 땅에 인간이 어떻게 잘 조화해서 살 것인가 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땅은 좋고 나쁜 것이 없고 스스로 그러한 모양으로 존재하고 있다. 여기에 인간이 땅과 슬기롭게 조화해서 살아야 한다. 인간이 조화하기 어려운 땅이 인간의 눈에는 좋지 못한 땅으로 보일 뿐이다. 자연 그 자체로서는 선악의 판단에 구애되지 않는다. 땅과 조화할 수 있는 기반은 인간이 땅의 지기를 느껴서 자신과 잘 맞는 장소를 선택할 뿐이다. 그렇지만 땅은 있는 그대로 인간의 적절한 선택과 활용에 따라서 길지와 흉지로 나뉘어 분류할 뿐이다.
그런데 인간은 문명을 만듦으로써 점차 자연과 멀어졌고 이에 따라 인간의 본능적인 능력으로서의 땅에 대한 기감(氣感) 능력은 상실되었다. 기감이 상실된다면 풍수지리의 이론체계는 쓸모가 없어질 수 있다. 소위 기감이란 막연하고 상징적인 뜻을 현출하여 나타내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지기를 거론하는 특정 인간에 의하여 각종 풍수지리상의 이론 서적이 만들어졌다. 다시 말해서 풍수지리가가 직접 땅의 기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땅의 생김새와 여러 가지 단서를 가지고 직접적으로 지기를 파악하려는 모든 노력이 풍수지리 이론의 주류를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하 海印의 경험을 기술한다. 즉, 학생 시절에 개인적으로 사회와 지리 과목을 좋아했다. 그때부터 원초적인 관심이 많았던 학문 분야가 바로 지리 방면이었다.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이렇다. 즉, 풍수지리도 인간이 유익한 터전에서 좀 더 오랫동안 발복을 받자는 인간 의지가 뭉쳐져서 학문화되었다. 무릇 인연이 있는 자는 그 이익을 취할 것이요, 아닌 자는 그냥 지나칠 뿐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또한, 海印(해인)이 풍수지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 연유는 이렇다.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출발한 해결방법론으로 명리학문을 배웠고, 그 연결고리인 주역이라는 학문도 습득하였고, 인간의 생긴 모습을 보고 나서 장차 개인의 운명이 어떻게 진행하는가에 대한 추측이 가능한 관상 학문과 골상 학문과 음성학문 등을 연구하였고, 좌우지간에 운명이란 요상한 눈에 보이지 아니한 분야를 눈에 보이는 학문으로 현출하기 위한 각종 학문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당 글의 핵심 내용인 "풍수지리 학문"을 만나게 되었다.
그 연유와 습득 과정은 이러하다. 즉, 해인이 명리 학문을 약 10여 년 이상 줄기차게 연구하여 그 학문의 근본적인 이치를 터득하였지만, 내가 원하는바(특정 개인의 타고난 사주팔자를 고치거나 바꿀 수 있는 방법론 습득)를 얻지 못하여, 불암산 중턱 큰 바위에 음각된 거대한 입식 부처상 앞에서 작정하고 백일기도 및 해답을 얻을 때까지 약 일 년 정도 하단전 호흡법 수련과 기도를 올렸다. 결국 하늘 즉, 천지신명으로부터 가르침이 있었다. 즉, 모년 모일 모시 새벽 하단전 호흡법 수련을 끝내고 마무리 冥想(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非夢似夢間(비몽사몽간)에 눈앞에 나타나는 글자 즉, “남아있는 것은 遺骨(유골)뿐이다.”를 보고 나서, 당시 서울시 동작구 사당동에서 한국역학교육학원 원장님인 명리 학문 선배님이자 두 번째 사부님 故 김석환 님을 만나서, 같은 학원에서 수강한바 있는 학원 후배이신 한국남 씨를 통하여 고향 선배님이자 풍수지리가 남헌 이준기 님을 소개받았다.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이준기 풍수지리 사부님과 함께 남한 팔대 명당 등 전국 팔도를 두루두루 돌아다니고 간산하면서 풍수지리학문에 대한 이론과 현장 실습을 겸행하였다.
최종적으로 옛날 명리 학문에 대한 한계(?)를 보고 나서 切齒腐心(절치부심) 百日祈禱(백일기도)까지 감행하면서 얻은 인간의 유골에 관한 연구 즉, 음택 풍수지리학문의 限界(한계)까지 마침내 喝破(갈파)해버렸다. 周易(주역)과 명리 학문은 시비를 걸 수 없는 학문적인 이론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렇지만, 풍수지리학문은 누구든지 명확하게 시비를 걸 수 있는 즉, 玄學的(현학적)인 학문이 아니라 衒學的(현학적)인 학문이자 종교적인 학문이었다.
결국 최종적으로 특정 개인이 소위 明堂(명당)을 얻으려면 첫째, 인격이 완벽한 배짱 좋은 風水地理家(풍수지리가)를 만나야 하고, 둘째 당해 명당에 대한 인연의 큰 법칙이 적용되어야 가능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결국, 양택 풍수지리는 나름 합리적인 이치(이론과 규칙)를 구성하여 좀 덜하지만, 음택 풍수지리학문은 당해 풍수지리가의 심적인 또는 땅의 명암에 대한 소개는 당해 風水地理家(풍수지리가)의 풍수지리 학문에 대한 높고 非凡(비범)한 견해와 인간성에 상당한 부분 좌우된다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부터, 음택 관련 풍수지리학문을 연구하는 부류의 족속을 敬而遠之(경이원지) 다시 보게 되었다. 하여간 천하의 중생은 “정법과 팔정도”를 가르치는 佛家(불가)의 사상을 완벽하게 실행함이 장차 좀 더 不幸(불행)을 멀리하고 幸運(행운)을 가깝게 당기는 處世方法(처세방법)임을 알리면서 이만 줄인다. 끝.
海印導師 合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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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세월(약 일갑 동안 겪은 세월의 상흔과 치료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