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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자 사용 상나라의 건국

海印導師 0 4,439 2018.08.14 09:03

상나라의 건국

갑골문, 은허의 세계로 안내하다

요약 하남성 안양현 소둔촌에서 하천이 범람하여 갑골의 파편이 대량으로 발굴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발굴이 진행되어 궁전과 거주 유적, 청동기와 도자기 등 상나라의 후기 도읍이었던 은의 유적, 즉 은허가 발굴되었다. 이전까지 사람들은 상나라의 실재를 의심했었으나 발굴된 은허가 그 의심을 풀어준 것이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기원전 1122년 : 은의 기자()가 조선에 들어왔다고 전해짐
기원전 1000년경 : 청동기 문화 확산

갑골의 파편으로 상나라의 수도 은의 유적을 발굴하다

1899년의 어느 날, 갑골의 파편이 한 학자의 집에 찾아들면서 3,000년이 넘도록 땅 속에 감추어져 있던 상()나라의 실체가 밝혀지게 되었다. 상나라의 후기 도읍지인 은()의 유적, 즉 은허가 발굴되었던 것이다. 상나라는 역사적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마지막 도읍지 은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은허

은허상나라의 수도.

그 학자는 왕의영. 그는 당시 국자감의 제주, 오늘날의 국립대학 총장이었는데, 금석학 등에 조예가 깊어서 그의 문하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 유철운이 갑골문을 발견하는 행운을 얻었다. 왕의영은 말라리아에 걸려서 특효약으로 소문난 용골을 갈아 먹게 되었다. 용골이 막 빻아져 약재로 변하려는 순간,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유철운이 문득 범상치 않은 글자의 흔적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4년 후에 《철운장귀()》라는 책을 발간함으로써 갑골문자의 존재를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되었다.

상나라 영역

상나라 영역역사적으로 검증된 최초의 중국 왕조 상나라의 영역.

전설 속 상나라의 실재를 확인하다

그러던 중 하남성 안양현 소둔촌에서 하천이 범람하면서 갑골의 파편이 대량으로 발굴되었다. 이 지역은 1928년부터 약 10년간 본격적인 발굴이 진행되어 대량의 갑골 파편, 궁전과 거주 유적, 훌륭한 청동기와 도자기뿐 아니라 이를 만든 장인의 공장, 엄청난 순장자와 정교한 청동제 보물이 함께 매장된 순장묘 등이 발굴되었다. 특히 짐승문양을 새긴 청동 주물들은 매우 출중한 작품으로 꼽힌다. 이곳은 기원전 1300년부터 기원전 1046년까지 상나라의 후기 도읍이었던 은의 유적이었다.

왕의영

왕의영은허 유적을 발견한 중국 학자.

20세기 초까지도 사람들은 상나라의 실재를 의심하고 있었다. 상나라는 전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나라일 뿐이었다. 그러나 갑골문자가 안내해 준 은허의 세계는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한 청동문물이었다. 《사기》에 기록된 은 왕실의 세계표는 거의 오차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사기》의 〈은본기〉에 의하면, 상나라는 탕왕()에 이르러 하나라의 걸왕()을 쓰러뜨리고 주변국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지위는 불안정하여 수도를 다섯 번이나 옮긴 후에야 비로소 은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에는 도읍을 옮기지 않고 273년 동안 유지되었으니 세력이 안정되고 농업이 발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 이후 상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이 다시 진행되면서, 각지에 상()왕조 시대 유적이 드러났다. 그 중 하남성 정주의 상성 유적은 가장 큰 도읍 유적으로, 기원전 1600년 상나라 건국 당시의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정주의 청동기 유물은 은의 청동기에 비해 상당히 원시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다.

한자의 원형, 갑골문자가 발굴되다

은의 유적에서 가장 중요한 발굴은 역시 수만 편에 달하는 갑골편에 새겨진 문자이다. 갑골은 점에 사용되던 귀갑과 수골을 줄인 말로, 실제로 귀갑은 거북의 등껍질보다 배 껍질이, 수골은 소의 어깨뼈가 많이 사용되었다. 이제 겨우 한자를 배우기 시작한 초보자의 눈으로도 갑골문 몇 자는 확인할 수 있다. 갑골문자는 한자의 원형이며 문장의 구조도 오늘날의 중국어와 같다. 세계의 고대문명 중에서 중국처럼 일관된 문화를 유지해 온 나라는 드물다. 그 동력으로 한자라는 공동의 문자를 꼽는 데 주저하는 사람은 없다. 한자는 표의 문자라서 언어가 다른 여러 민족들과 광대한 영역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었던 중국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갑골 위에 점괘를 기록하다

갑골문에 '상()'이라고 새겨진 선명한 글자가 확인되었다. 상의 왕은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항상 점을 쳐서 길흉을 판단하였다. 즉, '신의 뜻'을 묻는 것이다.

갑골의 뒷면에 구멍을 내어 단상에 올려놓고 제사를 지낸 다음, 이곳을 불로 지지면 균열이 생기게 된다. 이때 균열의 형태나 수, 주변의 색깔 등으로 신의 뜻을 판단했다. 정인()이라고 불렸던 점술사는 점을 친 후, 언제 누가 무엇에 대해 점을 쳤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를 갑골 위에 기록했다. 이것이 바로 갑골문이다.

갑골문 귀갑

갑골문 귀갑갑골문자가 적힌 귀갑. 은허 유적 출토품.

그런데 당시 국가의 중대사란 기상이나 자연현상, 농사의 풍흉, 자연재해, 제사, 전쟁, 수렵, 임신, 질병 등 온갖 것이 다 포함된다. 나라의 크고 작은 일들이 신의 뜻을 묻는 형식을 통해 결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갑골은 일회용으로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은허의 한 갱에서는 한꺼번에 1만 7,700편의 귀갑이 출토되기도 했다. 말하자면 당시의 쓰레기 처리장이 오늘날의 가장 중요한 유적이 된 셈이다. 현재 점괘를 기록해 놓은 복사()는 총 16만 개 이상이 남아 있다.

강력한 제정일치의 신권정치가 행해지다

상나라에서는 왕에 의한 강력한 제정일치의 신권정치가 행해졌다.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 왕은 자신만이 하늘과 소통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지녔다고 자처하면서 장엄한 제사 의식을 통해 이를 증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신권정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의 위대한 힘 앞에서 끝없이 무력감을 느껴야 했던 초기국가의 일반적인 정치형태다.

상나라 사람들은 10개의 태양이 땅 속에 있다가 매일 하나씩 교대로 천상에 나타난다고 믿었기 때문에, 열흘 간격으로 다음 태양이 떠오르는 밤마다 일상적으로 점을 쳤다. 그 열 개 태양의 이름이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즉 십간()이다. 하늘 신과 땅의 신, 그리고 조상신을 숭배했다. 특히 사망한 선왕이 천신의 뜻을 전달해 인간세계에 복이나 화를 내린다고 믿었기 때문에 선왕에 대한 장례와 조상에 대한 제사를 매우 성대하게 치렀다. 제사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은 왕의 가장 중요한 업무의 하나였다.

은의 갑골 복사

은의 갑골 복사1의 뼈 왼쪽 각자는 유()의 제사에 소를 써도 좋은지의 여부, 2는 참수의 의례, 3은 행이라는 사람의 길흉을 점친 것이다.

왕은 수천 명의 귀족 전사와 함께 대규모 원정을 수없이 감행했는데, 상 나라에 복속된 연맹부족들은 공물을 바치고 유사시에 병력을 제공하는 한편, 은의 제사를 공동을 받들었다. 즉, 당시의 제전은 은의 지배력을 확인하는 유일한 의식 절차로서 의미가 있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청동기가 발굴되다

은허에서 갑골문 다음으로 찬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세계 최고 수준의 청동기들이다. 그 제작기술은 흔히 서양의 르네상스기에 비견되는데, 특히 청동제기의 정교함과 세련미는 따라갈 것이 없다. 제기는 반드시 하나씩만 만들어졌으니, 제사에 바친 그들의 정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청동기는 왕과 왕족, 그리고 귀족들, 즉 지배층의 독점물이었고 그들에 의해 무기나 제기로만 사용되었다. 그들은 청동무기로 무장하고 지배력을 주변지역으로 확대해나갔으며, 신의 후예임을 자처하면서 화려한 제사의식으로 백성들 위에 군림했다.

은대 말기의 도철기룡문 격정

은대 말기의 도철기룡문 격정괴수의 얼굴을 새긴 도철문은 은 · 주 시대에 유행한 문양으로 무서운 짐승의 얼굴을 통해 악령을 퇴치하려는 주술적 성격을 띤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 부를 빼앗긴 중인과 신체의 자유를 박탈당한 전쟁 포로

생산 활동은 '중인()'으로 불렸던 하층 계급이 왕과 귀족에 예속되어 사회적 부를 창출했다. 생산기술에는 커다란 진전이 없었다. 그들은 청동문명의 혜택에서 소외되어 여전히 토기나 목기, 석기를 사용하고 있었고, 반지하식 움집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은 살아서는 회랑으로 둘러싸이고 다시 토성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궁궐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고, 죽어서는 청동기 · 옥기 등이 대량으로 부장된 화려한 무덤에 매장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최하위 계층은 전쟁 포로였다. 그들은 귀족의 노예로서 신체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사고팔리거나 죽임을 당했다. 주인이 죽은 뒤 순장되거나 제물로 바쳐졌다.

백성 통제를 위해 야만적으로 다스리다

왕은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해 감옥을 짓고 잔인한 형벌로 공포감을 주어 야만적으로 다스렸다. 목을 베거나 배를 가르고, 코나 발꿈치를 자르며, 살을 베어내 잘게 다지는 등의 온갖 잔혹한 형벌이 자행되었다.

특히 충격을 주는 것은 대규모 순장의 풍습이다. 대형 묘에는 한꺼번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왕의 사후 생활의 편의를 위해 생매장되기도 했다. 가까운 신하와 처첩, 호위병, 하인들이 매장되었다. 이러한 풍습은 귀족 계층에도 확산되었다.

갑골문의 저주, 갑골문 연구를 집대성한 학자들이 비극을 맞다

갑골문의 연구는 왕의영, 유철운, 그리고 나진옥과 그의 제자 왕국유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그런데 이들의 삶이 모두 비극으로 끝나게 되어 사람들은 이를 '갑골문의 저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왕의영은 의화단 사건 이후 외국 군대가 북경에 진주하게 되자 이에 격분하여 자결했다. 유철운은 백성들의 참상을 보다 못해 정부의 허가 없이 관곡을 풀어 나누어준 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유철운의 친구였던 나진옥은 일본에 망명했다가 만주 괴뢰정권에 관련되어 두고두고 지탄을 받았다. 청 말의 대표적인 학자로 유명한 왕국유는 언제나 전통복장을 하고 변발을 허리께까지 드리우고 다녔는데,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에게 제왕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는 청조의 몰락을 바라보다가 이를 비관하여 자살로 인생을 마감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상나라의 건국 - 갑골문, 은허의 세계로 안내하다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 3. 23., 가람기획)


​2018.08.14. 海印導師 자료를 옮겨서 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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