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풍수지리 현장 실습 강론{妖祥(요상)한 집터에 관한 回憶(회억)}
凶家(妖祥한 집터) 거주 경력
그러니까 지난 1967년 경이다. 나의 탄생지 경북 경주시 마동 987번지 소재의 약 4,000평 과수원과 논 6,000평이 채권자의 손에 넘어가 버리자, 당장 이사할 곳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같은 동네의 6XX번지(대지 약 500평)의 집이 비어 있었다. 당 집은 같은 동네의 故 南虎龍 氏(6.25참전 상이용사) 소유의 집이었는데, 그 집에서 불이 자주 나는 등 흉한 일이 발생하자, 南 氏는 당 집을 비워두고 같은 동네의 뒤 편 언덕에 새로 농가 집을 신축하여 이사한 후, 빈 집터였다.
당시 그 집을 싼 값(약 일십오만 원)에 매수하여 海印 가족은 이사했다. 이사한 다음 해에 海印은 경주시 황오동 모처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서 千秋의 恨을 남겼다. 이하 설명하는 내용은 과학적인 근거는 없을지라도 거의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다.
즉, 그 집에서 약 육 년이 지난 시점에 海印은 고교를 졸업하고 장사를 하기 위해서 인근 도시 경주시 사정동으로 이사했다. 당시 자나 깨나 그 집에서 하루라도 빨리 떠나야 할 것 같은 正確(정확)하게 알 수 없는 某種(모종)의 强迫觀念(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그래서 海印은 모친에게 거듭 말씀 드려서 마침내 허락을 얻은 결과였다.
사건의 발생은 그 시점부터 당 집에 세를 얻어서 이사를 한 가족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1973년부터 1978년까지 6년 동안(海印의 사고를 포함하면 총 10년)에 일어난 사건을 말한다.
맨 첫 번째 이사를 들어 온 사람은 徐某 氏(作故)다. 그의 가족은 현재도 같은 마동 인근에서 구멍가게를 열고 있다. 徐 氏의 장남 서00이 같은 해 교통사고를 당해서 현장에서 즉사했다. 그래서 徐 氏 가족은 현재(경북 경주시 마동 진입로 근처)의 구멍가게 터로 이사를 가 버렸다.
두 번째 이사를 들어 온 사람은 裵某 氏(作故)다. 역시 공교롭게도 그의 아들 중 장남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현장에서 즉사했다. 사건 후, 전에 세 들었던 徐氏의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그의 가족은 凶家라고 판단했는지는 몰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윗동네 탑마을로 이사를 가 버렸다.
세 번째로 집세 없이 이사를 들어 온 사람은 박수 무당이자 獨不將軍 崔某 氏였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그의 장남도 교통사고를 당해서 현장에서 즉사했다. 그러자 崔某 氏는 경주시 통일전 근처로 이사를 가 버렸고, 온 동네에 凶家라고 소문이 나고 이사를 들어오는 사람이 없어서 海印 가족이 경주에서 벌였던 중화요리 식당(春秋飯店)을 접고 다시 그 집으로 이사한 1978년도까지 약 이 년간 집이 비어 있었다.
불행은 그곳에서 그치지 않았다. 1978년도 코오롱 호텔에서 음악 관련 일을 하면서 아래채 방에서 월세를 살던 음악가 청년이 그곳에서 연탄가스에 질식사했다. 海印의 모친은 당 사건 때문에 경주경찰서로 여러 번 불려갔다.
불행한 사건은 그곳에서 끝나지 않았다. 먼저 기술한 南氏의 장남(남XX)이 역시 당시로 볼 때 최후에 교통사고로 현장에서 즉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 집으로 인한 가족의 불행을 피하고자 집을 신축하여 이사까지 감행했던 남씨 부부(作故)의 결행도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동안 海印은 연속한 흉한 사건을 직접 목격하면서 “참 이상하기도 하다. 내 후에 반드시 기록으로 남길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사실 海印도 장남(絶對的인 見解라고 確言할 수 없다)이다. 그 집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던 가족의 장남 중에서 유일하게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은 衆生은 바로 海印뿐이었다.
그래서 그러한 믿을 수 없는 사건은 개인적으로 腦裏(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결혼하여 장남의 탄생 전에 그 집을 賣買(매매)하기 위하여 맨 처음 그 집을 소개해 준 徐某 氏(철도청 근무 직원. 作故)를 찾아가서 그에게 “結者解之(결자해지)라~ 형님께서 이 문제를 풀어 줘야 할 것 같습니다. 가격에 상관없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 집을 팔아 주십시오”라고 그 간의 사정설명과 함께 간곡하게 부탁했다.
때마침 우연의 일치로, 근처에서 온천수가 나온다는 소문 때문에 그 영향으로 외지에서 투자하는 某氏에게 海印의 염원대로 장남의 탄생 전에 서둘러서 당 집을 매매할 수 있었다. 당시 위 徐某 氏가 전화로 적정가격에 계약하자는 소리를 하길래, 성동경찰서에서 근무 중 특별휴가를 내고 당일 비행기를 타고 가서 매매 건을 성사시켰다. 그렇게 속이 후련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그 때가 가장 속이 후련했다.
그 후 현재까지 딱 한 번 당 흉가를 근처에서 바라본 적은 있다. 왜냐하면, 비록 타인의 가족이었지만 당 집에 거주했던 사람들에게 발생한 연속적인 凶한 사건의 기억이 흉하고 징그러웠기 때문이다. 당시도 그 집은 비어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그래서 海印이 더욱 양택과 음택 풍수지리에 대해서 깊이 파고들었다. 이 세상일이란 어떤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발생한다는 인과관계의 등식이 성립한다. 설령 그럴지라도 불행한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는 연유는 반드시 면밀하게 살펴봐야 또 다른 불행한 사건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제언을 하면서 이만 글을 줄인다.
丙申年 癸巳月 己酉日 辛未時를 지나면서~~~
海印東洋哲學院에서 몇 字 記錄을 남기다.
海印導師 合掌.
그 내용은 이러하다. 某 兄嫂님 曰, 당 터는 그 동안(海印導師가 賣買한 정묘년 초 경부터 그러니까 약 32년 동안) 두세 사람 소유자가 바뀌고 난 후, 약 이삼 년 전에 최종 구매한 사람이 <팬션>을 몇 채 건축하였는데, 건축 도중에 작업자 한 사람이 지붕에서 추락하여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였단다. 당시 부상의 정도가 심하여 거의 식물인간이 되었단다. 그 사건이 발생한 후, 팬션의 건축도 미완상태로 <팬션 사업>도 개업하지 못한 채, 현재 빈 건물로 방치되고 있다라는 내용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南 某 兄嫂님과 대화를 나눈 곳에서 위 집터를 바라보니까, 당 터의 시커먼 색 건물 몇 채의 상단부 지붕이 보였다. 사진을 찍을 수 있었지만, 다음으로 미루고 참았다. 그러니까, 당일은 비가 제법 내렸고, 海印導師가 직접 고속도로로 차를 몰고 상경해야 하는 심리적인 負擔이 있었다. 마음 속으로 <고속버스를 타고와서 사진을 찍어서 기록으로 남길 예정>임을 작정하고 발길을 돌렸다. 진실로 끈질긴 凶家 관련 사건 사고가 진행중이다.
위에 거론한 서 모씨의 가게는 헐리고나서, 새로 지은 아담한 노란색칠한 작은 주택이 들어서 있었다. 서씨 가족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고, 현재는 외지의 사람이 이사를 와서 그곳에 거주한다고 전해 들었다. 끝.
2019.09.07. 海印導師 記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