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現夢(Dreem)回顧★용인철학관★궁합·택일★海印導師●
지난 을유년 겪은 꿈을 회고한다. 즉, 나는 태생 시절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고 성장했다. 일익 14세 전후하여 대운과 세운이 불운한바, 부친의 가세가 기울어 집안이 몰락하였다. 경제적으로 모자람이 없던 환경에서 어려운 환경 즉, 절벽에서 떨어지는 상황을 맞이했다. 당시 철없던 시절인지라 집안의 경제가 몰락하고 부친이 사망하는 등연이어 발생한 불행한 사건에 도통 뭐가 뭔지도 잘 모르면서 하루하루 세월만 지나갔다.
그렇지만 한번 어려워진 가정 형편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어려운 상황을 개선하고자 개인적으로는 분발하였지만, 사회 경제적인 환경의 개선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첫번째로 시도한 길거리 행상에서 중화요리 식당 "춘추반점" 운영과 건설현장 막노동부터 건설회사에 토목기사로(경주공고 토목과 3년 졸업) 취업하여 약 4년간의 중동(UAE.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쿠웨이트 등)외국 취업을 끝으로 1983년 05월 20일 경, 최종 귀국 후에 당시로부터 약 5년 전, 1979년 02월 경에 故 자강 이석영 선생님과 벽천 김석환 선생님에게 師事(사사)한 명리학문의 이치에 따라서 개인의 사주팔자와 대운을 분석한 후에 경찰공무원 최하위 직책인 순경으로 轉職(전직)하여 취업하였다.
그러던 중, 2,005년 경, 세월이 흘러서 나이 53세에 초급간부 경위 직책으로 승진하였고 그 결과는 파출소장의 직책으로 은퇴하기 위하여 약 2년에 걸쳐서 죽자사자 열심히 공부하여(하루 8시간을 무조건 책읽기를 강제로 버티었다. 만약 하루 8시간을 채우지 못할 경우, 다음날을 넘기지 않고 반드시 모자란 8시간을 강제로 채웠다.) 힘겹게 경위 승진시험에 합격하여 마침내 시험승진하였다. 그 후, 나의 개인적인 대운과 연운을 살펴본바, 본인에게 5년 이내에 닥쳐올 세운의 불운을 회피하기 위한 作戰(작전)을 펼쳤다. 작전은 다름 아닌 조상님 산소의 移葬(이장)이었다. 전에 해인동양철학원 천기 지론 설파에서 밝힌 바 있던, 天機(천기)를 알고자 불암산 중봉 거대한 암석에 陰刻(음각)된 거대한 불상 앞에서 100일 기도와 동시에 하단전 호흡법을 매일 실행하여 어느날 새벽 명상 중 비몽사몽간에 보았던 운명 개선 글씨 즉, "남아 있는 것은 유골뿐이다"의 구체적인 실행 작전이었다.
그래서 당시 친했던 언론인 친구 이모씨의 소개로 후배 풍수지리가인 전기 관련 사업자 서상* 지관에게 위탁하여 산소 이장을 할 수 있는 터를 마련하고자 경남 합천군 모처에 약 2만 8천 평의 산을 사들였다. 그래서 지성이면 감천이라, 흉당에 모셔진 직계 조상님 유골을 이장할 산과 터를 마련한 후, 증조부모님 산소 2기와 조부모님 산소 2기와 부친 산소 1기 등 총 5기를 날을 잡아서 명당과 무해무득지에 각각 이장하였다. 당시 조상님 산소 이장작업을 모두 끝낸 시점이었다. 그날도 경자생 막내 남자 동생과 함께 그동안 이장작업의 완료에 따른 노고를 상호 격려하면서 조상님에 대한 자손의 할 도리를 수행했다고 형제간 우애를 다지며 상호 칭찬하였다.
그다음 날 경남 합천군 소재 모 여관에서 새벽에 꾼 꿈을 소개한다. 가족 소유의 선산을 내려오던 중, 평평한 지형의 잘 모르는 산길 같은 곳에서 흰 도포를 입고 수염을 길게 기른 산신령 같은 어떤 도인을 만났다. 그 도인은 아무 말도 없이 내게 다가오더니 갑자기 오른손으로 나의 입속으로 깊숙하게 쑥 넣었다. 그 후 그는 손에 시커먼 역청 같은 물질을 한 움큼 쥐어 입 밖으로 꺼내더니 그 역청을 땅에 세차게 뿌려 버렸다. 당시 꿈속이었지만 상당하게 속이 시원하고 후련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그 道人(도인)은 강한 시선으로 나의 신체를 바라본 후,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의 가던 길을 걸어갔다. 나는 감사하다는 절을 올린 후 고개를 들어보니 그 도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당시 나는 이유가 없는 소화불량증(경찰병원에서 위내시경을 실시해보았지만, 약한 염증 이외에는 별 탈이 없었다)으로 약 5년 정도 경찰병원 내과 의사로부터 위장약을 타 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 꿈을 꾼 다음 날부터 현재까지 소화불량증세가 귀신같이 없어졌다. 그래서 나는 나름 판단했다. “내가 본인의 대운과 세운이 불리한 때와 상황을 피하고 면하기 위하여 흉당에서 고생하시는 조상님의 유골을 명당이나 무해무득한 터를 마련하여 이장했던바, 산신령님이나 나의 조상님께서 그 행위를 예쁘게 보시어 소화불량증이라는 개인적인 걱정거리를 해소해 주신 普施(보시) 해결 능력 즉, 내 속병을 낫게 해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나 보다"라고 추론할 뿐이었다.
원래 나는 태생인 주변 환경{과수원 巽方(손방)에 선친과 친하게 지내는 여승이 운영하는 개인사찰이 있었다.}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神(신)을 信奉(신봉)하는 者(자)였고, 그러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그렇지만, 어린 나이 청소년 시절에 최악의 상황을 경험한 나의 냉정한 판단은 “나 이외에 나를 도울 자는 없다”라는 철저한 無神論 的(무신론 적)인 견해를 고수하였고, 그에 입각한 많은 지론을 펼치면서 글을 써 내리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그날 위 꿈을 현몽한 이후에는 나의 개인적인 신념과 지론에 변화가 왔다. 아니, 이거 귀신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믿는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든지 아니면 각종 해악을 주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怪異(괴이)하다.
청년 시절, 소싯적 종교적인 배신감으로 인하여 그렇게도 강하게 귀신을 부정했고, 지속적으로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강한 분노를 표출하기 위하여, 천둥과 벼락이 내려치고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날과 때를 골라서 나의 태생지 과수원 뒷편 넓은 논길과 들판을 가로질러 내달리면서, “청소년 시절에 당한 당대의 불운에 대해서 하늘에 항거하고자, 눈에는 눈물을 흘리고 입으로는 고함을 내지르면서 하늘아! 귀신아! 절대적인 존재야! 내가 퍼부을 수 있는 최대의 저주와 욕설로 너를 저주한다. 내 말을 거역하면 지금 당장 나에게 벼락을 내려쳐라! 라고” 공중에 포효(고래고래 고함쳤다.) 하면서 폭풍우가 그칠 때까지 뛸 수 있을 때까지 마지막 숨을 내쉴 수 있을 때까지 들판의 논둑길을 가로질러 뛰다가 마침내 쓰러졌다. 얼마 후, 폭풍우가 그쳐서 태양이 빛나고 정신을 차려보니까, 내가 당시 우리 과수원 옆으로 흐르는 하천의 모래사장 위에 누워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들판의 깨끗한 도랑 湧泉(용천)에서 흙투성이가 된 옷을 빨아서 툴툴 털어 짜 입고 나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집으로 되돌아갔던 시절도 있었다.
그 후, 인류의 현자에게 밝은 지식을 얻기 위하여 칸트 · 포이에르 바흐 · 루소 · 벤담 · 니체 · 파스칼 · 한비자 · 왕충 · 상앙 · 플라톤 · 소크라테스 · 베이컨 등 동양 서양 사상 서적과 각종 종교적인 경전인 팔만대장경 · 성경 · 코란 등에 더욱 심취하여 독파하였고, 끝내는 “특정 인간의 마음이 처음과 끝을 장식할 수 있으며, 천지자연 즉, 法身佛(법신불)을 인정하는 편이 현생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가 있다”라는 범신론(汎神論)적 견해를 유지하면서, 오늘 현재를 치열하게 또는 한가하게 “순간을 영원처럼” 悠悠自適(유유자적)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참고로 “범신론(汎神論)”이란 이렇다, 즉, 자연과 神(신)의 대립을 인정하지 않고, 일체의 자연은 곧 신이며 신은 곧 일체의 자연이라고 생각하는 종교관. 또는 그런 철학관. 인도의 우파니샤드 사상, 불교 철학, 그리스 철학, 근대의 스피노자ㆍ괴테ㆍ셸링 등의 철학과 사상이 이에 속한다. 끝.
海印導師. 合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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