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철학원★동백개명★人類 最大의 詐欺劇●
옛날,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을 하였다는 사실이 영국의 BBC 방송국 기자들에 의해 밝혀지고 영국 법정에서 재판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영국 BBC 방송국의 기자 세 사람은 10여 년간의 조사 끝에 1982년「성혈과 성배」(The Holy Blood And The Holy Grail/ 미카엘 베이전트, 리처드 레이, 헨리 링컨 공저)라는 책을 통하여 위와 같은 놀라운 내용을 밝힌바 있는 데 책의 주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예수(지저스 크라이스트)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을 하여 자녀까지 두었으며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구세주 행세를 하며 다윗 왕을 계승하여 유대의 왕이 되려다가 유대인의 반발로 인해 처형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예수의 처남 아리마대의 요셉을 통하여 많은 뇌물을 받은 바 있는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와 짜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 같이 연극을 하고는 그 뒤 부활의 연극을 한 다음 로마 병사들의 호위 속에 프랑스로 망명을 하였다. 아내 막달라 마리아와 자녀들과 프랑스 골(gaul) 지방에 정착한 예수는 은둔 생활을 하며 80세를 넘게 살다 죽었다.
프랑스 남부의 마을 렌느 르 샤토에서 수 킬로 떨어진 야산 몽 카르두 지역에 예수의 무덤이 있으며 막달라 마리아는 렌느 르 샤토에서 교회를 세워 교구장으로 지내다가 프랑스의 액생 프로방스 생봄에서 죽었으며 예수의 제자 나사로는 마르세이유에 주교관구 <겔트 교회>를 세워 주교로 있다가 거기서 죽었다. 예수의 후손들은 4세기 후에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 왕조에 동화되었으며 카롤링거 왕조의 비지코트가 등 8개의 가문을 이루었으나 이후 기독교가 번성함에 따라 예수의 혈족은 겉으로 예수의 혈통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살아왔다.
1,099년에는 예수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고드프로아 드 부 이용>이 십자군 전쟁 때 예루살렘에서 십자군이 세운 예루살렘 왕국에서 잠시 다윗 왕을 계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예수의 친척 징표를 가진 귀족을 포함하여 많은 예수의 후손들이 현재에도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 살고 있다. 이러한 예수 가계 비밀에 대해 성당기사단(聖堂騎士團, 1118년 예루살렘 순례자 보호를 위해 조직된 교회 군대)과 시온의 소수도원이라는 유명한 비밀조직은 깊이 믿고 신뢰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비밀에 대해 자세한 비밀기록들을 간직하여 남겨 놓았다. 그것이 중세 성당기사단의 지방지부의 성터가 남아있는 프랑스 남부 마을 <렌느 르 사토>에서 1891년 폐허가 된 이 성채의 성당을 복원하던 교구 신부 <베랑제르 소니에르>에 의해 양피지 문서와 보물이 발견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보물과 고문서를 팔아 막대한 부를 누린 신부에 관한 이야기를 조사하던 기자들에 의해 모든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BBC 방송에서 부분적으로 3차례에 걸쳐 방송까지 된바 있는 이러한 내용의 책 <성혈과 성배>가 출판되어 세계를 경악케 하자, 이에 놀란 영국의 기독교와 천주교인의 사실 확인 소송이 영국 법정에 제소되어 재판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대로 예수를 믿어온 가문의 기독교인이 주심판사를 맡아 3년 간에 걸쳐 심리를 하였으나 프랑스에 사는 예수의 27대 후손 피에르 프랑타르씨 등 많은 증인과 증거들을 비롯해 조상이 예수로 되어 있는 족보 책과 프랑스의 <렌느 르 사토>에 예수의 묘비명이 있는 예수의 무덤까지 현지 답사하여 확인하고는 무덤의 사진까지 보여주며 재판이 심상치 않게 나가자 재판장이 3개월 동안 재판을 중단하고 몸저 눕는 사태까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책의 내용을 모두 인정하는 판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심 판사는 판결을 미뤄오다 빨리 판결하라는 법원의 독촉을 받고 판결하기를 "나도 3대째 예수를 믿어온 집안의 자손으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무던히 노력하였습니다만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하여 84살까지 살다 죽었습니다. 예수는 로마 병사 판델라의 아들이었습니다. 책의 내용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라고 판결을 하였다. 이에 이러한 판결을 지켜보던 신부, 수녀, 목사들은 법정 방청석에서 옷을 찢고 통곡을 하였으며 기독교인이 목을 매고 자살하는 등의 소동이 벌어지고 교회가 문을 닫는 등의 소란이 영국 전역에서 확대되어 영국 정부에서는 이러한 혼란이 지속되고 전 세계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판결문의 공개 및 해외 유출을 금지시키고 언론에 보도를 통제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이 일이 있자 영국 국민의 대다수가 다른 종교로 바꾸었거나 무신론자가 되는 등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으며, 이 여파로 기독교의 신자가 극감하고 교회가 술집 등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미 재판과정을 지켜본 영국의 기독교인들은 약 80%가 회교 등 타종교로 개종을 하였으며 무신론자가 되는 등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으며, 이 여파로 기독교의 신자가 극감하고 교회가 술집 등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유럽과 미국 등에서도 수많은 교회가 문을 닫는 등의 소동이 이어졌다.
1982년 처음 책이 나와 세계적인 화제가 되자 대한 민국에서는 전 언론(동아, 조선, 중앙, 부산일보 등)에서 보도(사진3 :1982.2.20자 동아일보)를 하였으나 재판과 판결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보도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기독교가 급격히 퇴락하던 그 당시의 세계적 추세와 달리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에 편승하여 계속해서 급성장하는 이변을 낳았다.
그리고 또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이 죽지 않았다는 증거로서 예수의 시신을 쌌던 성의(聖衣)라고 하여 기독교와 로마 교황청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증거로 삼던 세마포(“토리노 성의”로 불려 왔음)가 죽은 사람이 아닌 산 사람을 감쌌던 것이라는 것이 과학적 분석과 여러 가지 문헌의 고증에 의해 밝혀진 바 있었다.
국내에서도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앨마 그루버, 홀거 케르스텐 지음, 홍은진 번역, 아침이슬 간행)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음을 더욱 분명히 밝혀 주고 있다.
토리노 성의는 1세기 때부터 유대와 유럽의 교회와 왕가에 때로는 공개 전시되며 보관되어오다 1460년에서 1983년까지 성의를 보관해 오던 사보이 왕가에서 교황청에 기증하게 되어 현재 로마 토리노의 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죽은 시체에는 필요가 없는 100근(40kg)이나 준비된 상처 치료제인 몰약과 침향(알로에 추출물)(요한복음 19:40)과 피, 땀 등에 의해 얼굴과 전신이 그대로 새겨져 있는 토리노 성의는 과학자들의 분석에 의해 상처 입은 산 사람을 싼 세마포라는 것이 밝혀져 오히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유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1988년 10월 13일 토리노의 대주교 <발레스트레오> 추기경은 토리노 성의가 13∼14세기에 만들어진 모조품이라고 발표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아는 과학자들이 공개적인 검증을 계속 요구하자 1997년 9월 5일에는 토리노의 성의가 예수의 시신을 쌓던 진품이라고 번복 발표를 하고는 감정 요구에는 일체 응하지 않고 있다. 토리노의 성의는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사람의 몸을 감쌓던 것이지만 그마저도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증거물이 되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음을 더욱 분명히 증명하고 있다.
옛날,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을 하였다는 사실이 영국의 BBC 방송국 기자들에 의해 밝혀지고 영국 법정에서 재판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영국 BBC 방송국의 기자 세 사람은 10여 년간의 조사 끝에 1982년「성혈과 성배」(The Holy Blood And The Holy Grail/ 미카엘 베이전트, 리처드 레이, 헨리 링컨 공저)라는 책을 통하여 위와 같은 놀라운 내용을 밝힌바 있는 데 책의 주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예수(지저스 크라이스트)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을 하여 자녀까지 두었으며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구세주 행세를 하며 다윗 왕을 계승하여 유대의 왕이 되려다가 유대인의 반발로 인해 처형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예수의 처남 아리마대의 요셉을 통하여 많은 뇌물을 받은 바 있는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와 짜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 같이 연극을 하고는 그 뒤 부활의 연극을 한 다음 로마 병사들의 호위 속에 프랑스로 망명을 하였다. 아내 막달라 마리아와 자녀들과 프랑스 골(gaul) 지방에 정착한 예수는 은둔 생활을 하며 80세를 넘게 살다 죽었다.
프랑스 남부의 마을 렌느 르 샤토에서 수 킬로 떨어진 야산 몽 카르두 지역에 예수의 무덤이 있으며 막달라 마리아는 렌느 르 샤토에서 교회를 세워 교구장으로 지내다가 프랑스의 액생 프로방스 생봄에서 죽었으며 예수의 제자 나사로는 마르세이유에 주교관구 <겔트 교회>를 세워 주교로 있다가 거기서 죽었다. 예수의 후손들은 4세기 후에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 왕조에 동화되었으며 카롤링거 왕조의 비지코트가 등 8개의 가문을 이루었으나 이후 기독교가 번성함에 따라 예수의 혈족은 겉으로 예수의 혈통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살아왔다.
1,099년에는 예수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고드프로아 드 부 이용>이 십자군 전쟁 때 예루살렘에서 십자군이 세운 예루살렘 왕국에서 잠시 다윗 왕을 계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예수의 친척 징표를 가진 귀족을 포함하여 많은 예수의 후손들이 현재에도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 살고 있다. 이러한 예수 가계 비밀에 대해 성당기사단(聖堂騎士團, 1118년 예루살렘 순례자 보호를 위해 조직된 교회 군대)과 시온의 소수도원이라는 유명한 비밀조직은 깊이 믿고 신뢰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비밀에 대해 자세한 비밀기록들을 간직하여 남겨 놓았다. 그것이 중세 성당기사단의 지방지부의 성터가 남아있는 프랑스 남부 마을 <렌느 르 사토>에서 1891년 폐허가 된 이 성채의 성당을 복원하던 교구 신부 <베랑제르 소니에르>에 의해 양피지 문서와 보물이 발견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보물과 고문서를 팔아 막대한 부를 누린 신부에 관한 이야기를 조사하던 기자들에 의해 모든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BBC 방송에서 부분적으로 3차례에 걸쳐 방송까지 된바 있는 이러한 내용의 책 <성혈과 성배>가 출판되어 세계를 경악케 하자, 이에 놀란 영국의 기독교와 천주교인의 사실 확인 소송이 영국 법정에 제소되어 재판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대로 예수를 믿어온 가문의 기독교인이 주심판사를 맡아 3년 간에 걸쳐 심리를 하였으나 프랑스에 사는 예수의 27대 후손 피에르 프랑타르씨 등 많은 증인과 증거들을 비롯해 조상이 예수로 되어 있는 족보 책과 프랑스의 <렌느 르 사토>에 예수의 묘비명이 있는 예수의 무덤까지 현지 답사하여 확인하고는 무덤의 사진까지 보여주며 재판이 심상치 않게 나가자 재판장이 3개월 동안 재판을 중단하고 몸저 눕는 사태까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책의 내용을 모두 인정하는 판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심 판사는 판결을 미뤄오다 빨리 판결하라는 법원의 독촉을 받고 판결하기를 "나도 3대째 예수를 믿어온 집안의 자손으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무던히 노력하였습니다만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하여 84살까지 살다 죽었습니다. 예수는 로마 병사 판델라의 아들이었습니다. 책의 내용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라고 판결을 하였다. 이에 이러한 판결을 지켜보던 신부, 수녀, 목사들은 법정 방청석에서 옷을 찢고 통곡을 하였으며 기독교인이 목을 매고 자살하는 등의 소동이 벌어지고 교회가 문을 닫는 등의 소란이 영국 전역에서 확대되어 영국 정부에서는 이러한 혼란이 지속되고 전 세계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판결문의 공개 및 해외 유출을 금지시키고 언론에 보도를 통제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이 일이 있자 영국 국민의 대다수가 다른 종교로 바꾸었거나 무신론자가 되는 등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으며, 이 여파로 기독교의 신자가 극감하고 교회가 술집 등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미 재판과정을 지켜본 영국의 기독교인들은 약 80%가 회교 등 타종교로 개종을 하였으며 무신론자가 되는 등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으며, 이 여파로 기독교의 신자가 극감하고 교회가 술집 등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유럽과 미국 등에서도 수많은 교회가 문을 닫는 등의 소동이 이어졌다.
1982년 처음 책이 나와 세계적인 화제가 되자 대한 민국에서는 전 언론(동아, 조선, 중앙, 부산일보 등)에서 보도(사진3 :1982.2.20자 동아일보)를 하였으나 재판과 판결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보도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기독교가 급격히 퇴락하던 그 당시의 세계적 추세와 달리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에 편승하여 계속해서 급성장하는 이변을 낳았다.
그리고 또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이 죽지 않았다는 증거로서 예수의 시신을 쌌던 성의(聖衣)라고 하여 기독교와 로마 교황청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증거로 삼던 세마포(“토리노 성의”로 불려 왔음)가 죽은 사람이 아닌 산 사람을 감쌌던 것이라는 것이 과학적 분석과 여러 가지 문헌의 고증에 의해 밝혀진 바 있었다.
국내에서도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앨마 그루버, 홀거 케르스텐 지음, 홍은진 번역, 아침이슬 간행)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음을 더욱 분명히 밝혀 주고 있다.
토리노 성의는 1세기 때부터 유대와 유럽의 교회와 왕가에 때로는 공개 전시되며 보관되어오다 1460년에서 1983년까지 성의를 보관해 오던 사보이 왕가에서 교황청에 기증하게 되어 현재 로마 토리노의 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죽은 시체에는 필요가 없는 100근(40kg)이나 준비된 상처 치료제인 몰약과 침향(알로에 추출물)(요한복음 19:40)과 피, 땀 등에 의해 얼굴과 전신이 그대로 새겨져 있는 토리노 성의는 과학자들의 분석에 의해 상처 입은 산 사람을 싼 세마포라는 것이 밝혀져 오히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유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1988년 10월 13일 토리노의 대주교 <발레스트레오> 추기경은 토리노 성의가 13∼14세기에 만들어진 모조품이라고 발표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아는 과학자들이 공개적인 검증을 계속 요구하자 1997년 9월 5일에는 토리노의 성의가 예수의 시신을 쌓던 진품이라고 번복 발표를 하고는 감정 요구에는 일체 응하지 않고 있다. 토리노의 성의는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사람의 몸을 감쌓던 것이지만 그마저도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증거물이 되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음을 더욱 분명히 증명하고 있다.
로마 제국 초기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한 유대 왕국에서 태어난 예수는 (로마 병사인 판델라가 마리아를 강간하여 예수를 낳았다는 말이 있고 실제로 독일에서는 판델라의 묘비까지 발견되었다) 13세가 되어 헤브라이 관습에 따라 아내를 맞이해야 될 즈음 많은 신분 높은 이들이 그를 사위로 맞이하기를 원했는데 이것은 어려서부터 그의 총명함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현재 인디아의 오릿사주(州)에 있던 나라의 왕족인 라반나가 유대 왕실의 제례에 참례하러 왔다가 예수의 총명함을 보고 인디아에 유학할 것을 권유했다. 라반나의 권유에 마음이 끌린 예수는 부모에게서 은밀히 나와 상인들을 따라 인디아의 신드지방으로 오게 된다.
그 후 10년 동안 인디아와 네팔, 티베트에서 팔리어(語)와 산스크리트어를 익히고, 열심히 종교와 각종 학문을 공부하는데 처음에는 브라만교(힌두교의 뿌리)에 속하였으나 나중에는 붓다(불타=부처) 샤키야무니(석가모니=고타마 싯다르타)의 교리에 눈을 뜨게 되고 그의 평등사상을 받아들여 불교에 귀의하고 승려가 되어 '이사(Issa)'라는 법명을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24세 때 페르시아를 경유하여 귀국하던 중 자신이 태어날 때 찾아온 조로아스터교 사제 '홀', '룬', '메루'의 3인의 동방 박사와 재회한다. 이하 계속~~~
#용인철학원, #동백철학원, #기흥철학원, #용인아파트풍수지리, #동백아파트풍수지리, #기흥아파트풍수지리, #용인작명, #동백신생아작명, #기흥신생아작명, 죽전개명, #분당작명
즉, 아나톨리 포멘코라고 하는 러시아의 유명한 수학자(전문분야는 토폴로지입니다)가 쓴 글이 있는데, 이 사람의 글이 러시아와 구 동독 지역에서는 상당히 많이 읽히고 있다고 합니다.
개략 내용은 이렇다고 합니다.
1. 유럽 '고대사', '중세사'는 모두 다 조작.
2. 고대 그리스, 로마, 샤를마뉴, 신성로마제국은 다 조작.
3. 교황사도 16세기 이전에는 다 조작.
4. 11세기 이전에는 '역사'란 건 없었음.
5. '고대사' 문건들은 겨우 몇 권의 책들로 지탱되어지고 있는데, 고대 '그리스', '로마' 어쩌구 하는 문명들을 증명해 줄 책들은 거의 대부분 16세기 초에 발견되었으며, 이것들을 처음 출판한 사람(브라치올리니)은 문서위조로 당시에 아주 이름이 쟁쟁했던 자.
6. 13세기 이전에 유럽에서는 기사들이 탈 정도로 큰 말들이 없었음. 그러므로 기사들이 말타고 싸우던 중세의 이미지는 거짓.
7. 고대 '이스라엘'은 지금의 '콘스탄티노플', 즉 '이스탄불'이고, 예수는 서력 1053년에 나서 1086년에 십자가에 못박힘.
8. 로마의 창시자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안)와, 오스만(옷토만이라고도 발음됨) 터키 제국의 창시자 오스만(옷토만)은 동일인물이며, 이것은 모두 다 우크라이나의 코사크 두목을 나타내는 '아트만'이라는 말에서 온 것임.
9. 11세기 초에서 말까지 유럽과 중앙아시아 전체를 총괄하는, 이름을 잃어버린 '대제국'이 있었으며 그 수도는 이스탄불, 제2수도는 모스크바에 있었으며, 후세의 모든 '대제국'의 추억은 거기서 나온 것임.
10. 그리스 신화와 로마 신화, 플루타르크 영웅전은 모두 다 시인 페트라르카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며, 페트라르카는 플루타르크와 동일인물로, 로마 시의 역사를 높이기 위해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지어낸 것임. 영웅전에 나오는 '인물들' 에는 페트라르카의 친구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들은 페트라르카의 붓에 의하여 로마 황제들로 둔갑되었음. 페트라르카와 이들이 나눈 편지가 존재함.
플루타르크 영웅전에는, 훨씬 재위기간도 길고 중요한 칼리굴라, 네로 등의 전기는 없고, 재위기간도 짧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갈바, 오토의 전기가 있는데, 갈바와 오토는 페트라르카와 동시대인들임.
11. 로마 황제 '비텔리우스'(재위 68년) 는 16세기 초에 어느 조각가의 모델임.
12. 로마 '역사가' 율리우스 리비우스는, 16세기 초에 살았던 줄리오 리비임.
13. 고대 이스라엘/유태, 초기 기독교사의 원천이 되는 '요세푸스'의 책들도 거의 다 가짜. 탈무드 전체에 요세푸스라는 이름은 단 한 번도 언급이 없음.
포멘코는 중국사 일본사도 조작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것은 그가 중국어, 일본어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는 것으로 볼 때 무시해도 좋을 것이고,
이 사람은 고대 이집트로부터 중세에 이르는 여러 점성기록을 컴퓨터로 돌려서 결과를 얻어냈으며, 수십 명이 넘는 러시아 과학자들의 도움을 얻었다고 합니다.
특히, 투키티데스가 기원전 5세기에 일어났다고 한 일식들은, 포멘코에 의해 기원후 12세기에 일어난 것이 맞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런식으로 진실이 밝혀지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서양사가 부풀려지게 된 이유는 서양의 여러 왕들이 자기들이 더 오래 되었다고 뻐기기 위해서 허풍을 떨어 댄 때문이라고 합니다.
역사에서 '반복되는' 일들은, 반복된 것이 아니라 똑같은 일들이 적혀진 책을 이름들만 조금씩 다르게 고쳐서 갖다 이어 붙인 것이며,
일단 기본적인 뼈대만 갖추어지면 글쟁이들이 알아서 살을 붙여 나간 것이라는 게 이 책의 골자입니다.
초등학교 중퇴인 사람이 세계적인 유명 대학의 박사라고 하여 사람들을 속이고 스스로 가짜 자신감을 얻는 것이 바로 역사조작입니다.
뼈대 있고 유서 깊은 집안의 아들에게 너희 집안은 볼품없는 노비였다고 속이는 일이 일제시대에 일어난 것입니다. 힘을 빼앗고 자신감을 상실시키기 위함이죠.
20만권의 역사서가 일제시대에 불탔고, 지구의 역사를 한반도의 역사로
이식하여 축소 조작했습니다.
역사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정체성을 말살해 힘을 빼버리는 것이죠. 패배주의와 우리는 원래 소규모였다는 의식의 싹을 자르는 일입니다.
아나톨리 포멘코의 저서에서 배워봅니다.
Minwon Suh선생님 께서 댓글로 주신 말씀을 본란으로 모시고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海印導師.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