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동양철학원

●威化島回軍遺憾★용인사주★용인택일★용인궁합★海印導師●

海印導師 4 1,945 2022.10.31 16:02



한반도 땅은 고려 말 경, 이성계라는 신흥 군부세력이자 고려왕실의 大逆敵 때문에 대륙정벌을 포기하고 반도에 머물면서 중국에서 대륙침략을 근원적으로 포기하게끔 정략적으로 던진 주자학과 양명학{명나라의 유학자인 왕양명(王陽明 : 왕수인)에 의해 이론적 체계를 갖춘 양명학은, 주자 등 남송(南宋) 성리학자들의 '성즉리[性卽理 : 인간의 선성(善性)이 곧 하늘의 이치]' 사상에 맞서 '심즉리(心卽理 : 인간의 마음이 곧 하늘의 이치)'를 주장한 남송(南宋) 시대의 유학자 육상산(陸象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특히 양명학은 주자학의 핵심 테제라고 할 수 있는 '성즉리(性卽理)'와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심즉리(心卽理)'와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제시했다. '격물치지설'이 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면 앎에 이른다는 주장으로 선지후행(先知後行)을 강조한 반면 양명학의 '지행합일설'은 앎과 행동은 선후(先後)로 나눌 수 없고 서로 일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격물치지'와 '지행합일'은 주자학과 양명학이 갈라서는 가장 큰 분기점이다.}인 <理氣論>을 던진 결과, 이를 대륙국가에서 자칭 중심 국가이자 하늘과 天子의 學問으로 誤認하고 이를 덥석 문, 사리 분별없이 맹종하는 사상을 퍼트린 사실로부터 연결하여 결국, 구한말 경 "경술국치의 씨앗이 잉태"되었다고 추론한다.


즉, 이씨조선 정계에서 학문했다고 자부하는 인사들에게 내분을 일으키려고 가르쳐준 주자학과 양명학문을 가지고, 정신 나간 이 땅의 공자 왈 맹자 왈만 배운 당시 식자들이 한 마디로 우주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국가가 국방을 튼튼히 하여 스스로 자립 옹위하지 못하면 곧 재산도 인권도 깡그리 없어진다는 냉정한 사실)도 없는 가운데, 쓸데없이 허무맹랑한 <理氣論 卽, 主理論 主氣論>을 가지고 감 나와라! 떡 나와라! 하면서 국방을 게을리 하고 武力을 능멸하고 더 나아가서 젊은이들에게 文弱을 유도하는 교육방법으로 사서삼경 명심보감 천자문만 외우게 하고, 국가방위와 兵法 習得과 활기찬 武術 硏磨를 게을리 한 결과, 드디어 왜놈들에게 36년간의 치욕 즉, 국권을 빼앗긴 실마리를 준 위인이라고 봐도 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의 정확한 추론이다.


좌우지간에 이성계가 易姓革命으로 세운 이씨조선의 非人倫的인 悖惡한 各種 事件과 歷史의 흐름, 다시 말해 개새끼보다 못한 역사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아니한가? 왜냐하면, 조선왕조 개국 초반부터 그의 아들 이방원이 형제를 주살하고, 삼촌(태종 이방원)이 조카(단종)를 죽이고, 숙모(광해군)를 겁탈하고, 한마디로 개새끼보다도 못한 인성을 가진 이성계 후손의 유전자에서 국가적으로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자체가 애시당초 어리석은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소갈머리 없고(임진왜란중 명장 이순신을 일시적으로 배척한 사건) 정치적으로 천하의 무능함의 끝판왕인 행위 즉, 임진왜란 초기에 수도인 한양을 버리고 중국 요동으로 도망 가려했던 당시 임금인 선조를 보라! 또한, 그의 아들인 광해군과 증손자대 연산군의 실정을 보라. 비록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는 등 실정한 광해군은 그래도 나라를 위해서는 뛰어난 (신흥세력 청나라에 적당하게 아부하고 망해가는 명나라 세력에 거리를 두는 정책실현한 공적이 있었다) 외교전술이라도 감행했다. 좌우지간에 그러한 쌍놈의 유전자가 지랄 발광하는데도 불구하고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의 치욕적인 因果應報로 같은 혈통이 한반도 국가 군왕의 지위에서 약 500년간 이 땅을 다스렸으니까 근세조선이 치욕적인 망국을 당한 것은 필연적인 결말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저러한 더러운 유산을 물려받았는데도 불구하고 현재 한반도에 남북으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국가가 세워지고, 북측의 必亡할 野慾인 "통일전선전략"의 "세부 실행지침인 김일성 장학금"으로 성장한 추종 적대세력이 대한민국 국가기관 곳곳에 침투하고 포진하여 좌편향적인 전 정권시절부터 드러내놓고 공작하고 최고법원까지 진출하여 훼방하는데도 불구하고 망하지 않고 좌경화로 위기의식에 각성한 다수 국민이 당대 최후의 결정 다시 말해, 자본주의 국가관이 확립된 인물로 인식되는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되어 이만큼이나마 현 국가를 지탱하는 것도 천만다행인 줄 알아야 한다. 이씨조선의 그러한 역사는 부끄럽기 짝이 없고, 차라리 이 땅의 역사에서 지워버려야 할 치욕적인 국가의 역사임에 틀림없어 이렇게 냉정하게 기록하여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향후 두 번 다시 국권을 침탈당하는 역사가 발생하지 말도록 韓半島 터전에서 生存하는 소시민의 분기탱천(憤氣撐天)하는 心精으로 몇 자 기록한다. 또한, 오늘 새벽에 발생한 이태원 압사사고 희생자의 명복을 빌고, 迅速하게 官民이 일치단결(一致團結)하여 當該 事故收拾에 萬全을 기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또한, 당해 사고발생에 대한 유책성을 따지자면, 사전 정보활동을 게을리하여 혼잡경비대책을 소홀한 사고 발생지역 관할 하급 경찰서장과 경찰상부 조직 상급 행자부장관 등 두 사람 행정 관리 직책에 대한 신속한 경질이 있어야만, 국가 조직관리 질책성 사후조치에서 무난할 것으로 전망한다. 觀世音菩薩!!!!! 南無阿彌陀佛!!!!!!


海印導師 合掌.

덧붙임 글 제목 : ♡ 슬픈 이태원의 유래 ♡

'이태원'은 한자로 '梨泰院'이라 씁니다.

이태원의 이름은 한자만 3번 변했습니다. 조선 초에는 '오얏나무 李'를 써서 '李泰院' →임진왜란 이후에 '異胎院' →효종 이후에는 '梨泰院'으로 글자와 의미가 변합니다.

원래 이태원은 서울을 벗어나 처음 만나는 원(院)이었습니다. 서쪽의 홍제원. 동쪽의 보제원. 남쪽의 이태원과 인덕원은 서울 부근의 중요한 첫번째 원이었습니다.

이태원은 지금 용산고등학교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태원의 역사를 살피다 보면 슬픈 이 땅의 역사가 떠오릅니다.

슬픈 역사하면 역시나 조선 시대의 '양대 칠푼이' 선조와 인조가 등장합니다.

아시다시피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카(소서행장)와 가토 기요마사 (가등청정) 부대는 경쟁적으로 진격하여 가토 기요마사 부대는 남대문으로 유키나카부대는 동대문으로 입성합니다.

그 결과 이들이 처음 통과한 문이라는 상징성을 바탕으로 조선총독부는 남대문과 동대문을 조선고적 1.2호로 지정했습니다. 결국 이 문들은 오늘날 대한민국 국보 1호와 보물 1호가 되었습니다. (이런 아픈역사가 있음에도 불 타버려 졸속 복구한 남대문을 국보 1호라고 전 세계에 자랑하는 나라 꼴이라니, 한술 더 떠서 괘변으로 그를 합리화시키는 일부 정신나간 친일파 학자 들을 보면 ㅠ.ㅠ)

한양에 들어 온 '가등청정'은 이태원에 주둔을 합니다.

주둔중에 '가등청정과 부대'는 여자들을 겁탈하기 시작하는데, 대분분의 여자들은 피난을 가버린 상황이라 그 대상은 피난을 가지 못한 여자와 이태원 황학골에 있는 '운정사'의 비구니들이 주대상이었습니다.

천주교 신자이자 반전론자인 상인 출신의 소서행장과 불교신자이자 주전론자인 장수 출신의 가등청정은 일본에서부터 라이벌이었는데,

오히려 불교신자인 가등청정은 여승들을 겁탈하고 운정사까지 불살라 버립니다.( 가등청정 이 썩어진 놈은 불국사도 불질러 버린 놈입니다.) 문제는 이 비구니들과 여인들이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게 됩니다.

절이 사라진 상태에서 비구니들의 아이들과 왜놈에게 겁탈당한 부녀자등이 애를 낳고 기를 보육원을 지어 정착케 하였는데, 당시 왜병들의 피가 많이 섞인 곳이라하여 이태원異胎圓(다른 민족의 태를 가지고 있는 곳)이라 부르게 되었다 합니다.

그후, 임진왜란이 끝나자 일본에 잡혀갔다 돌아온 조선여자와 왜란 중에 성폭행을 당한 여성과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사회적 문제로 등장합니다.

선조는 이에 이들과 그 자식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포로나 귀화한 일본인들을 한 곳에 몰아서 일종의 이방인 공동체 지역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곳이 이태원입니다

(출처 : 임하필기(林下筆記). 동국여지비고)

여기에 칠푼이 2호인 인조까지 가세하게 됩니다. 병자호란에 끌려갔던 여인과 그 자식들까지 상당수가 결국은 이곳으로 흘러옵니다.

이후, 북벌을 준비하던 효종은 지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곳을 배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이름의 梨泰院이라 고쳐 부르게 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습니다.

이태원은 우리 역사에서 오랜 기간 '이방인의 땅'으로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조선시대부터 용산 일대는 군사 관련 시설이 많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 군용지로 이용되면서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가 이곳에 머문 이후 이태원은 군사지역으로서 본격적인 정체성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조선에 온 청나라 부대는 1882∼1984년 이태원에 주둔했고, 이후 일본군 조선사령부가 1910∼1945년에 주둔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근대식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됩니다.

광복 이후엔 미군이 이곳을 차지했습니다. 6.25전쟁이 끝나고 나서 이태원 상권은 사실상 미군이 주도했습니다.

1957년 미군의 외박과 외출이 허용되면서 기지촌까지 생겨났습니다. 1970년대 미군기지에서 나온 물품들로 상권이 형성된 이태원은 이후 미군을 위한 유흥가로 거듭나 기지촌과 미국식 클럽이 우후죽순 들어섰습니다.

한편으로 정부는 이태원 미군기지 중심으로 서빙고동, 한남동, 동부 이촌동 일대에 외국인 전용주택과 아파트는 물론 고급 외국인 주택단지까지 건설합니다.

그러자 1960년대 이후 한국에 들어온 각국의 대사관이 이태원 지역에 대거 입주했고, 그 영향으로 197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고급주택단지도 조성됐습니다

이태원은 1990년대 이후 아프리카인의 유입이 늘면서 현재는 판잣집과 대저택이 공존하는 독특한 경관을 연출합니다

기지촌 단속으로 퇴폐업소가 사라지면서 경리단길과 더블어 한국 속의 외국으로 변화하는 '이태원'

웬지 가까와지지 않는 이방인의 느낌이 드는 도심지 이태원 ... 그 바탕에는 아프고 부끄러운 역사가 있었습니다. (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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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海印導師 2022.10.31 16:08
https://www.youtube.com/watch?v=pwtj_pYjSb4  요리할때 이것 넣고 만들었다가 자칫 암을 일으키는 의외의 음식!
海印導師 2022.11.01 21:46
https://www.youtube.com/watch?v=tJ5VssYotBc 당뇨에 보약보다 좋은 음식, 단 한가지! 당뇨에 좋은 음식 [정라레]
海印導師 2022.11.02 17:41
https://www.youtube.com/watch?v=KOZ_plabDsE  상황 파악 못하는 北! 美, 오늘 밤 당장 북폭 가능! 미군 전력 배치 현황!
海印導師 2022.11.05 13:26
https://www.youtube.com/watch?v=FtndMlSHJQ8  15만년 전 인류가 리셋됐다는 증거 TOP3 [미스터리]  <===지구 리셋설. 15만년전 제작 파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