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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政國家 滅亡 觀照♥용인작명소♥해인동양철학관♥海印導師●

海印導師 0 5 10:56

 

신정국가란" 신의 인간 대리자인 제사장이 지배권을 가진 정치 체계의 국가를 말한다. 현대는 1979년 이란의 팔레비 왕정을 혁파하고 신정정치를 표방한 故(고) 호메이니 옹이 세운 국가체제를 말한다. 현대사회의 견지에서 평가하자면, 신정국가라는 명칭부터 거부감을 강하게 준다. 神(신)이란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 虛像(허상)의 가상적인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약 진정 이 세상의 주재자가 있고, 신이 부여한 절대적인 권능으로 국가 지도자가 되었다면, 현재 시점에서 왜 세속의 권력자보다 더욱 비참하게 직위를 잃고 수족을 전부 잘리면서 말 한마디 못 하고 내쫓겨버리고 마는가? 현재 시점에서 이스라엘과 이란간의 전쟁은 상호 미사일 등을 폭격하는 수단으로 진행중이지만 짐작하건대, 과히 이란 신정국가 체제의 굳건한 공고함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래서 이른다. 즉, 인간이란? "인간의 인간다운 타고난 또는 길러진 모습 그대로 아름다운 마음과 신체를 유지하면서 강건하고 행복하게 생존한 후에 인연에 따라서 후손을 남기든지 말든지 때가 이르러 그냥 조용하게 사라지면, 자신의 탄생과 사망의 의무를 다하는 아름다운 존재임을 타인에게 기억하게 할 뿐"이로다.~~~ㅎㅎ~~~

海印導師. 合掌


이하, 이란 혁명이 발발할 당시에 팔레비 왕조를 쫓아내고 정권을 잡았고, 1989년 87세(세수 약 80세라고 추정하지만, 그의 정확한 나이는 미상이다.) 사망했다. 중동지역에서 이란 팔레비 왕조를 뒤엎고 나서 이슬람 원리주의에 의한 신정국가를 창설하여 약 10여 년간 이란의 국가 최고지도자로 군림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결국, 특정 인간이란 개인의 운세(대운&세운)로 따지자면 이렇다. 그는 태생부터 사망까지 일생을 우여곡절을 겪다가, 결국 사망 약 10여 년 전에 대운을 맞이하여 현대사회의 황제(국가 대통령보다 상위 직책)에 버금가는 권력을 휘두르면서 살다가 사망했지만, 냉정하게 따져보자면 이렇다. 당 시대의 정치적인 흐름을 잘 타면서 이슬람 근본주의로 살자는 명분으로 이란이라는 국가를 통치하다가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제2대 라흐바르 ”알리 하메네이“ 후계자에게 모든 직책을 물려주고 떠난 외로운 노인이었다.


이하 호메이니의 일대기를 옮기자면 이렇다. 즉, 호메이니는 1902년 9월 쯤 테헤란 남서쪽 호메인 마을에서 회교성직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전통회교 교육을 받고 20대 후반부터 시아파회교의 중심지 콤에서 교리를 가르치면서 독자적 견해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호메이니의 반체제 활동은 30년대부터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1941년엔 당시 팔레비 국왕의 근대화 정책과 영국의 이란 지배를 비난하는 평론을 쓰기도 했다. 호메이니는 독선적 성향과 엄격한 성품을 지닌 채 서구 지향적인 왕정에 대해 반대 투쟁을 계속하다 1964년 국외로 추방된다. 그는 망명 생활을 하면서도 국내 세력들에게 설교녹음테이프를 보내며 반정부활동을 지도하면서 이란 국내 정치에 지대한 관심을 쏟아부었다.


당시 이란은 오일달러로 흥청댔고 지도층의 부패는 날로 번져갔다. 1978년 팔레비 국왕에 맞서 시아파 회교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도시빈민과 고학력 실업자들이 가세한 이란 혁명 세력이 결성되자 호메이니는 이들의 정신적 지도자로 떠오른다. 1979년 1월 팔레비가 망명하자 호메이니는 15년 만에 귀국해 이슬람교 공화국에 종신 최고지도자로 추대된다. 회교 혁명정부 수립 이후 10년 동안 그는 절대적인 지도력을 발휘해 이슬람교 가치관에 바탕을 둔 사회를 건설하려고 노력했다. 회교 근본주의를 확산시키려는 호메이니의 열정은 친서구적인 다른 회교권 국가들을 자극했으며 이란, 이라크 8년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의 사상은 이렇다. 즉, 이슬람 사회의 모든 법률은 샤리아에 기원해야 한다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뿌리를 둔다. 쿠란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당연히 국가의 지도자는 이슬람 성직자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는 왕조 타도의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의 가문은 이란 토박이인 율법학자 가문이며 증조할아버지 대에 니샤푸르에서 인도 러크나우로 옮긴 후 할아버지인 아흐마드 대에 이란으로 돌아왔는데 아흐마드가 호메인 마을에 정착해서 낳은 아들인 모스타파의 아들이 그다. 그가 갓난아기일 때 모스타파는 지방 지주의 비리를 고발했다가 피살당했고 그는 집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이슬람 율법을 배웠다. 그는 종교 도시인 나자프와 쿰에서 시아파 이슬람 신학을 체계적으로 배운 뒤 정식 율법학자가 되었고 1929년에 하디제 사가피(1913년 ~ 2009년)와 결혼해 3남 2녀를 두었다. 1960년대 초까지는 쿰에서 이슬람 율법을 가르치고 연구했는데 훗날 후계자가 된 알리 하메네이가 그의 문하생이었다.


1979년 이란 혁명이 일어나 팔라비 왕조가 물러나자 이란으로 돌아와 임시 이슬람 혁명정부를 조직하여 메흐디 바자르간(مهدی بازرگان‎‎, 1907년 9월 1일 ~ 1995년 1월 20일)을 수상에 임명한 후 샤푸르 바흐티아르(شاپور بختیار‎‎, 1914년 6월 26일 ~ 1991년 8월 6일) 수상이 이끄는 정부군과 게릴라 전투를 벌이면서 이란은 혼란에 빠져들었지만 결국 정부군이 그에게 협력하게 되면서 호메이니 측이 승리하였다. 그는 만 16세 이상의 모든 이란 국민에게 이슬람 공화정 체제 찬반투표를 실시했는데 98% 이상이 찬성했다. 이에 따라 1979년 12월 신헌법을 공포하여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수립했다. 새로운 헌법에서 매 4년마다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했는데 자신의 비서였던 최측근 세예드 아볼하산 바니사드르(سید ابوالحسن بنی‌صدر‎‎, 1933년 3월 22일 ~ 2021년)를 대통령으로 삼고 스스로는 종신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슬람 공화국을 세우는 과정에 이란 혁명에 참가했던 다른 정파들이 반발했는데 이슬람 정권은 이들을 박해했다. 우선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 세속주의자들은 종교인들이 정치를 해선 안 된다는 이유로 공화국엔 찬성했지만, 이슬람 공화국에는 고개를 저었다. 종교지도자의 정치 개입을 비판하며 이슬람과 서구 민주주의를 절충하자고 주장한 당대의 대아야톨라 세예드 모하마드카젬 샤리아트마다리(سید محمدکاظم شریعتمداری‎‎, 1906년 1월 5일 ~ 1986년 4월 3일)는 그에 의해 1979년 11월 가택연금에 처하기도 했는데 그를 살려준 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숙청되었다.


1979년 3월 30일부터 31일까지 실시된 국립 투표에서 나온 이슬람 공화국 수립에 대한 거의 100%에 육박하는 찬성률은 당연하지만, 부정선거 의혹을 불러일으켰으며 그의 추종자들이 왕정의 협력자들뿐만 아니라 세속주의자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 중 신정 체제를 반대하는 세속주의 정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기 시작했는데 많은 사람이 암살되거나 암살 위협에 시달리다가 망명해야 했다. 좌파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문화혁명을 주도하여 1980년부터 2년 동안 이란의 모든 대학교가 폐교되었다가 이슬람주의자들의 입맛에 맞게 과목이 바뀐 후에야 다시 개종했다.


급속도로 근본주의로 흘러가는 분위기에 반대하여 진보주의자들이 대대적으로 시위를 벌였으나 그의 추종자들은 시위대를 '창녀', '제국주의 추종자'라고 하면서 시위대를 몰아세웠다. 신정 체제에 반대하는 성직자들은 가택 연금했다. 그는 바니사드르 대통령이 지나친 반미 정책에 회의감을 표하자 이란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하여 허수아비 대통령으로 만들고 스스로 사퇴하도록 종용했는데 결국 바니사드르는 그의 뜻에 따라 1981년 스스로 대통령직을 내려놓은 뒤 해외로 탈출했다. 이러한 강경 조치가 이어지자 반근본주의 움직임은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말았다. 이때부터 미국과의 계속되는 갈등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으로 지미 카터 행정부에 큰 타격을 입혀 재선을 실패시키지를 않나, 뒤에는 사담 후세인의 침공을 받아 이란-이라크 전쟁에 걸리질 않나, 하지만 이란-콘트라 사건 같은 흑역사를 보면 또 실용적으로 살 무기는 산 모양이다.


외교 능력은 막장으로 집권과 동시에 미국, 소련, 유럽 국가들, 중국, 튀르키예, 이스라엘, 이집트를 죄다 적으로 돌리는 위업을 달성했다. 군주제에서 공화제로 돌려놓은 혁명이라는 점에서 태생적으로 사우디, 요르단 같은 군주국들과 사이가 나빠질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고 팔레비 왕조보다는 이슬람 원리주의적인 성향 탓에 서방권 국가들의 거부감이 팔레비 왕조보다는 더할 수밖에 없다는 태생적인 한계도 있지만 팔레비 왕조를 미국의 개로 비하했으니 미국과는 당연히 사이가 나빴고 이란은 이때부터 미국에 경제제재를 받기 시작해 2016년에 핵 협상으로 해제될 때까지 고생한다.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도 사이가 나빴는데 그가 반정부적 인사들을 목매달 때 쓰던 레퍼토리 중 하나가 '저놈은 좌파다, 소련 첩자다.'였다. 유럽 국가들도 서방권인 데다 이단으로 매도하며 빌려준 돈을 다 떼어먹으니 역시 사이가 틀어졌고 혁명 수출론이다 뭐다 해서 중국 이슬람 교도 중에서 위구르족들에게 혁명을 일으키길 자극하니 중국과도 사이가 틀어졌으며 친서방 국가인 데다 세속적인 것도 모자라 종파까지 다른 튀르키예, 이집트와도 당연히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아랍권 국가들과는 종파가 다르다 보니 아예 역사적으로 철천지원수였다. 팔레비 왕조의 우방국인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는 지원받아 놓고 나중에는 입을 싹 씻고는 시아파가 아니란 이유로 일방적으로 우호 관계를 파기했고 시아파 율법주의로 그나마 좀 개방적으로 되어가던 아랍권에서 수니파 율법주의와 와하브파가 대두되는 연쇄 효과를 낳았다. 이러한 외교의 결과로 이란-이라크 전쟁 때 미국과 소련, 중국, 사우디 등 전 세계가 손을 잡고 이라크에 무기와 자금 대주면서 이라크의 대량 살상 병기 사용까지 눈 감아 줬고 이란은 이라크 대비 우세한 국력에도 이라크를 압도하지 못했다.


이런 고립을 타개하려던 차에 시비 걸어온 이라크를 조지려고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적극적으로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엄청난 피해만 입은 채 끝내야 해서 실의에 빠졌다. 결국 1989년 6월 3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86세을 채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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