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파발·障壁工事回想★용인철학관★동백철학관★수지철학관●
때는 바야흐로 기미년 초경, 구파발 장벽공사 시공 현장(陸軍 감독관이 准將 계급이었다)이었다. 당시 海印은 토목기사 직책으로 구파발 장벽 원형 R형 구조물 및 00미터 이상의 철문(이것 당시 군사비밀이라고 공개하지 않는다는 싸인한 기억이 있는데, 약 36년 지나서 면책 안 되는지 모르겠다만.....,ㅋㅋ 오늘 현재시점 46년前이다.) 등 구조물 시공 총책으로{토목과장이 있었지만, 책임자 관리명분뿐이었고 실제 내용은 구조물 시공담당 海印의 소관사항이었다. 왜냐하면, 전년도 철원군 김화면 와수리 소재 철책선 앞 장벽공사장의 障壁 시공경험이 있었고, 당시 장벽공사 瑕疵(하자)의 원인을 직접 목격한 海印이 基礎工事 前, "全 職員會議 時" 모래층인 당 구파발 지역에 기초를 설계 변경해서 “파일공법”으로 시공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제안함. 그래서 구파발 장벽은 파일공법 위에 설치된 그야말로 강도 8이상의 지진에도 문제없게 설계변경 후 시공함.} 펄펄 날리던 시절이었다. 장벽 구조물 설계변경 등 도안을 전문부서 직원과 협의한 후, 海印이 직접 설계 변경 드로잉에서 시공 작업까지 관장하여 관리했다.
그해 10月 26日 當時 中央 情報部長 故 김재규 叛亂 事態가 일어났다. 라디오에서 장송곡과 같은 음악이 흐르면서 故 박정희 대통령 각하 서거 소식과 함께 공사감독관 某 准將(준장)이 정신없이 왔다 갔다 설치는 모습을 보고 “아! 큰일 났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현재 느닷없이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 친한 후배에게 말한 마른 수건과 관련된 사건과 名技 사건이 그 당시 쯤이었을거란 상념이 문득 지나갔기 때문에, 海印導師가 직접 겪고 들어서 알고있는 역사적인 사건을 기록하여 후세에 알리자는 의미이다.
참으로 人生無常(인생무상)이라? 당시를 생각하면 그렇다. 왜냐하면, 당시 중구 필동에 거주하시는 역학계의 巨頭(거두) 자강 이석영 선생님을 당년초 경, 생전 처음 찾아뵈었다. 海印의 방문 이유는 서울대 건축공학과 출신의 南철O 토목설비과장과 어떤 모종의 거사를 계획 중, 혹시 성공이냐? 아니면 실패하고 감방이냐를 質疑(질의)하러 갔었다. 그때 이석영 선생님에게 海印을 인도한 南 과장으로부터 이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청취한 傳說(전설)은 이렇다. 즉, 故 김종필이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을 앞두고 서울 장안에서 유명한 명리학자인 자강 선생님 앞에 박정희 소장의 사주(丁巳年 辛亥月 庚申日 戊寅時 或 辛巳時)를 내밀었다. 김종필 曰 "선생님! 이분께서 거사를 기획 중인데 성공하겠습니까? 아니면 실패하겠습니까?" 자강 선생님께서 그가 내미는 사주팔자를 감정했고, 한 참 후에 말씀하셨다. "이 분의 거사는 성공할 것이며, 향후 18년간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죽는다." 그 후, 을묘년 경, 고 박정희 대통령의 심부름꾼인 某 인사가 자강 이석영 선생님을 다시 찾아뵈었단다. 그러한 인연으로 한국에서 唯一한 官認 "韓一易理學院"이 등록되었다.
그 曰 "선생님 또 한 번 자문을 구하러 왔습니다. 가르쳐 주십시오!" 자강 선생님 曰, "기미년 말과 경신 신유년 경 북방에서 불과 폭발로 인한 대통령 각하의 신변 위험이 있을 조짐인데, 미리 설치지 말고 이삼 년 기다린 후, 무오년 기미년부터 대비하세요." 사건이 그렇고 그렇게 진행되어서 무오년(1978년)부터 현대판 “千里長城(천리장성) 障壁工事(장벽공사)”를 155마일 중부전선 동쪽 끝에서 서쪽 끝 전선까지 국내 8개 건설회사가 긴급하게 투입되어 火急(돌관공사)하게 시공했다. 만약의 경우 제2의 한반도 남북전쟁이 勃發(발발)해서 북한 측이 대규모 탱크부대를 동원하여 밀고 내려올 경우, 탱크저지선 장애물 콘크리트 장벽을 말한다. 다시 말해, 서울의 외곽 최종 방어선 즉, 삼송리에 1차 구파발에 2차 탱크저지선 장벽을 의미한다.
당시로부터 약 일년 전 경, 海印은 대성산과 오성산 중간 철책선 앞 구간 와수리 캠프에서 현대건설 토목기사의 직책으로 구조물 및 토공 담당기사 역할을 담당했다. 그런데 당시 故 박정희 대통령이 북한의 남침이 아닌, 미국 CIA의 공작 관련, 김재규의 총체적인 국가위기 상황판단 오판으로 인하여, 배신한 부하의 총에 귀천세하리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 그 당시 그 사건을 접한 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海印이 처음으로 명리학문 분야 第一의 專門家(전문가)가 되겠다고 작정한 계기가 되었다. 계속해서 말한다. 위에 거론한 이유와 함께 海印이 명리학문과 풍수지리에 관심을 끌게 된 사건의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을 소개하여 거론한다.
1. 조부님{당시 과객 閑良으로 전국을 유랑하시면서 풍수지리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고 증조부님(조부님의 아버지) 산소를 양북면 소재 조부님 처가댁 山 明堂에 移葬(黃龍附舟血地)하셨다.}
2. 부친{사돈 사위의 감언이설에 현혹되어 과수원과 대농지를 강원도 원시림 벌목사업 등에 날리고, 부잣집 폐허 된 터(이곳 관련해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는데 후로 미룬다.)로 이사함.}
3. 구파발 장벽공사현장에서 무오년 말경, 어떤 연유로 자강 이석영 선생님을 만난 인연이 작용하였다.
4. 고모님 자녀(2+1)의 凶死(훗날 凶堂에 터를 잡은 할머니 산소를 海印이 풍수지리 관련 학문을 배우고 나서 風水地理 專門家와 함께 卽時 移葬처리 하였다.)
이러한 길고 치열한 삶의 旅程을 통하여 海印은 경찰관 직업을 거쳐서 公職 정년퇴직 후에, 사전에(임신년경, 海印寺 鐵板八萬大藏經 제작시 동참하였고, 海印 가족 이름이 새겨진 銅板般若心經 원판 한장을 소장하여 海印東洋哲學院內 海印精舍에 모셨다.) 企劃한 중이 아닌 중이 되었고, 드디어 현재 海印東洋哲學院長의 職責을 가지게 되었다. 끝
海印導師 合掌.
이하 사진은 약 일십 년 전, 경주중고동기 계사생 부부 동남아 코타키나발루 휴양지를 회갑 여행 중에 기념 촬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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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窮則變, 變則通, 通則久라고 말한다. 궁은 막다른 곳에 이르러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을 가리킨다.
海印導師 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