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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금강(金剛)이란 바꾸어 표현하자면 다이아몬드(Diamond)이다. 다시 말해, 모든 금속 물질을 자를 수 있는 극히 강한 물질(C&carbon)의 결합체이다. 모든 물질을 자를 수 있는 최소 단위의 원소가 결합한 극히 강한 물질을 다이아몬드라고 칭한다. 몹시 단단해서 절대 부서지지 않는 물질을 뜻하면서 종교적으로 대일여래(大日如來)의 지덕(智德)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씀이다.
바꾸어 말해서, 결코 부수거나 파괴할 수 없는 극강(極剛)의 물질을 상징적(象徵的)인 언어로 표시하여 소위 금강(金剛)이라 말한다. 불가(不可)의 경전(經傳) 중에서 지극히 강한 경전으로 가장 원리적인 표현의 경전이라 의미로 금강경(金剛經)이라 표현하여 사용한다. 그렇지만, 실험실에서 초고온(超高溫)의 불길을 지속해서 금강석을 향하여 쏘면, 금강석(金剛石)은 탄소로 분해되어 공중으로 날아가 버린다는 사실을 알면 좋다. 이는 물상의 세계에서 결코 완벽하게 집착(執着)할 대상이 없다는 뜻이다.
천하(天下)의 중생(衆生)이여! 불변(不變)의 물질인 금(Gold)의 가치가 높고 극강(極剛)의 물질인 다이아몬드의 가치도 높다. 결국, “온도의 차이”에 의해서 바람(風)이 일고, 바람의 흐름에서 만물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의 변화상을 필연적(必然的)으로 겪어가야 할 터, 그러한 순리적인 변화를 극구 부정하지 말고, 시와 때와 장소와 운기의 흐름대로 흘러가는 제행무상의 이치를 따라가는 변화 현상을 현생에서 즐김을 제안할진대 과연 어떻소이까? ~~~ㅎ~~~
대저(大抵) 금강경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불교 경전이다. 우리 海印東洋哲學院 법당(法堂)에 가면 항상 비치된 철판(鐵板)으로 제작한 경전이 바로 金剛經(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다. 한국의 불교는 臨濟 계통의 禪을 적통으로 하는 禪宗(선종) 중심의 역사이다. 선종(禪宗)에서 거의 유일하게 "소의 경전"{참고 : 소의경전(所依經典)이란 불교 경전으로서 신행(信行)을 비롯하여 교의적(敎義的)으로 의거하는 근본 경전이다.} 삼고 있는 것이 금강경(金剛經)이니 당연한 일이다.
금강경(金剛經)은 인도에서 대승불교의 초기에 성립한 산스크리트原典(梵本)의 존재가 확실한 경전으로 성립 시기를 대강 AD 150~200년경으로 본다. 금강경은 般若經(반야경)의 일부이다. 반야경이란 반야(般若)사상을 표방하는 일군의 책들에 붙여진 일반명사이다. 반야(般若)란 지혜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프리즈나(prajna)의 음역이다. 이 대승불교의 운동은 기독교의 <신약성경>이 쓰이기 시작한 1세기에 같은 문화권(희랍어-산스크리트어) 내에서 아주 비슷한 혁신적 생각을 표방하는 "一大 宗敎운동"이었다.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떨어져 있었음에도 비슷한 시기에 맥을 같이 하는 종교운동이 일어났음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를 학자들은 2차 축의 시대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금강경의 번역으로 총 6종이 있는데 鳩摩羅什(구마라습)과 玄裝(현장)의 번역을 최고로 꼽는다. 이 6종의 번역은 [大正 대장경]에 정돈이 되어 있다. 羅什의 번역이 最古이며 最高라 평가된다. 우리가 금강경이라 부르는 텍스트는 梁나라의 紹明太子(소명태자)가 32분으로 分節하여 各分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 分의 이름은 分의 내용을 개관하고 있어 우리가 금강경이라는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法會因由分(법회인유분)으로 시작을 하여 應化非眞分(응화비진분)으로 끝나는 총 32분의 이름은 소명태자가 얼마나 불교의 이치를 깊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羅什의 번역은 [고려대장경]에 정본으로 보존이 되어 있으며 일본의 [大正 대장경]도 해인사(海印寺)의 [고려대장경]을 원본(原本)으로 삼아 제작한 것일 뿐이다.
금강경(金剛經)을 읽어 본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금강경의 주요 내용은 초반부에 텍스트로서는 거의 다 표현이 되어 있다. 그리고 같은 내용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같은 텍스트로 표현이 되기도 하고 약간 다른 단어로 표현이 되기도 한다. 降伏其心(항복기심)이르는 목표를 위한 방법들이 반복적으로 설명된다.
왜 그런 것일까? 인도의 경은 문자의 경전이 아니다. 다시 말해, "암송(暗誦)의 경전(經典)"이다. 경전이 전승되는 것은 암송으로 된다. 암송은 소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소리의 힘과 무형성(無形性)이야말로 만물에 스며있는 [브라흐만]이라는 우주의 원리와 기운을 적절히 구현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사제(司祭)가 리그베다의 찬가를 부르면 그 음악은 공기를 가득 채우고 신도들의 의식 속으로 스며들어 간다. 이는 계속되고 계속된다. 노래를 부르며 암송하고 그 찬가들은 말이 가지는 한계를 넘어서서 초월을 느끼며 그에 가까이 가게 된다.
노래는 무엇인가? 기승전결(起承轉結)이라는 텍스트의 구조(構造)위에서 운율이 들어가고 후렴이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결국에는 그 텍스트마저 사라지고 만다. 노래만 남게 된다. 그가 인도의 경전이었다. 금강경은 이와 같은 인도 경전의 기본정신과 그 텍스트의 심오(深奧)한 내용을 대승불교(大乘佛敎) 운동가들이 절묘(絶妙)하게 엮어냈고 그를 鳩摩羅什(구마라습)이라는 천재가 중국 한자로 그 뜻과 맛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달하여 우리는 그 수많은 천재의 재능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은 금강경은 외워야 한다. 그래야 그 진의를 이해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논리의 전개가 아닌 깨달음의 찬가는 율동적인 노래로 불러야 한다. 최소한 眞言(例 : 옴남! 옴남! 옴남! 옴 치림! 옴 치림! 옴 치림!)만이라도 노래와 같이 불러야 원래 의도하는 진의(眞義)가 우러난다.
이하 암송(暗誦)할 경의 내용 일부분을 옮겨 쓰자면 이렇다. 즉, ===>나모바가바떼 쁘라가 빠라미따에 옴 이리띠 이실리 슈로다 비샤야 비샤야 스바하 ~~~ <===
海印導師 合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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