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廉性♥용인철학관♥용인개업택일♥용인남여궁합●
오래전에 기록한 글을 추억하여 다시 올린다. 즉, 청렴성이라?~~~ㅇㅎㅎㅎ~~~海印導師의 중학교 동기 친구들 사랑방인 전용 게시판에 해인도사의 전직장 생활 당시 30代~40代 초반쯤, 서울市警 사이드카 근무를 거론하길래, 몇 자 응대한 댓글을 이하 옮겨서 기록한다.
필명(筆名) “빨딱 선 물파스”가 말하기를, 삐딱성인가 아닌가 그 진의를 잘 모르겠지만, 일단 청렴(淸廉)하다고 존중해주니까는 하여간 듣기가 좀 부끄럽구먼~~~흠~~~그래! 친구들이 원한다면 듣는 사람 속 시원하게 몇 마디만 진술하겠다. 卽, 나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언제 어디서든 또한, 어떤 직책을 맡든 간에, 당시 주어진 직책과 환경에 최선을 다하면서 치열하게 나의 실력을 최대한 안전하게(正法과 八正道) 발휘(發揮)하였고, 치열하게 또는 한가하게 윤활유를 친 기계를 작동하듯이 부드럽게 당시 주어진 책무(責務)를 원활하게 잘 수행해왔을 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시골 부잣집(선친께서는, 果樹園 약 四千坪, 논 약 六千坪 이상 장원을 소유함)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國民學校 시절에는 대운지공(大運之功)으로 그 누구보다도 뛰어났고(國民學校 六 年間 皆勤賞과 六 年間 優等賞을 받았고, 4 · 5 · 6學年 會長 職責과 6學年 全校 어린이회장 직책을 담당했다), 당시는 친구가 부러워할 정도로 유쾌하고 멋진 유소년기(幼少年期)를 잘 보냈다.
그렇지만, 일익 15세 전후에 겪은 각종 불행한 사건과 사고는 나의 운세 최악으로 결코 예상치 못했고, 원치 않았던 소속 가문(家門)의 몰락(沒落) 과정을 직접 겪고 말았다. 당시 몰락한 집안의 어려운 환경을 디디고 일어서는 데는 “적법한 한도 내 수단과 방법”을 가릴 만큼의 사치스러운 여유가 나에게는 결코, 허용되지 않았다. 卽, 나의 기준에서 판단할 때, 海印導師의 삶에서 결코 부끄러운 행적(行蹟)은 없다. 설령, 그 행동이 강제성을 수반하였을지라도 말씀이다. 觀世音菩薩!!!!! 南無阿彌陀佛!!!!!!
어느 날, 귀신(鬼神)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직접 초래한 치명적인 신체 사고로 인하여 고통(苦痛)과 비탄(悲嘆)의 십대 중반을 지났고, 막상 20대 초반경, 정신을 차리고 “오랜 방황과 고뇌(苦惱) 끝에 깨닫기를, 크게 보아서 ‘어차피 인생은 생사여일(生死如一)일 뿐인 것’을 처절(凄切)하게 알게 되었다. 만약, 나에게 주어진 이 모든 악운과 불행이 나의 책임으로 기인(基因)하였다면, 그래 자살(自殺)해 버리자!” 그래서 {자살하지 않으려는 구실(우리 가문과 나에게 닥친 이 모든 불행이 오로지 나의 탓만은 아닌 사실을 찾기를 갈구하여 그 해결 방법을 찾는 화두)과 핑계(그래서 “나는 生存한다”란 명제 설정)를 찾기 위하여, 당시부터 운명 관련 학문과 관상술과 수상술과 독심술과 최면술과 하단전 호흡법과 각종 무술(武術) 등에 미치듯이 파고든 결과, 과연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었다} 命理學問의 큰 스승님 自彊 李錫英 先生님을 당시 현대건설 토목부 토목기사로 근무할 때인 무오년 겨울 1월 말인가 2月 초 경에 만나게 되었고, 정식으로 관련 학문을 사사(師事)하여 부지런하게 열심히 습득하였다.
그래서, 나의 운명을 “명리학문”을 통해서 정확하게 알고 나서 나의 직업을 警察官(고졸 후 사업상 또는 기타 관계로 타인과 싸우고 서너 번 잡혀간 파출소가 싫었고, 개인적으로 가장 싫어한 직업이었다.)으로 이를 악물고 취업했고, 경찰관 취업 약 7~8년 전부터 약 40여 년에 걸쳐서 약 6년(현재 시점 약11년) 前, 경 이곳 海印東洋哲學院을 개업할 당시까지 命理學問을 연구하고, 공부하고, 실관(實觀) 해왔었다. 그렇게 뜨겁고 치열하면서 또는 한가하게 살아왔다는 말씀을 드린다.~~~흠~~~
海印導師. 合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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