節制절제의 美學미학(미즈노 남보꾸)
관상학문의 원조는 중국의 麻衣相法이고, 관상 학문으로 길흉에 대해 명확한 판단을 해서 一家를 이룬 者는, 日本 國 "미즈노 남보꾸" 大 日本人이다. 하긴 당 시대는 사무라이 시대인지라, 언제 劍難을 당해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 학문의 核心은 언제 劍難을 당할까? 안 당하고 무사할까? 라는 生死에 직결하는 문제인지라, 관상 관련 학문이 크게 繁盛할 수밖에 없었다고 判斷한다.
그러면 현재는 어떤가? 당장 북한의 핵무기이니 방어조치인 사드니 떠들지만, 총 또는 칼과 같이 심장에 당장 구멍 나는 것이 아니고, 목이 잘려서 선혈을 내뿜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목구멍의 혈관이 온전한 때문에 이러한 시절은, 교통사고 등으로 현장에서 卽死하지 않으면, 亦是 가깝거나 일생에 걸친 삼생 특정 개인의 길흉을 판단하는 데는 命理學問과 六爻占과 奇門遁甲 方位術이 최고라고 判斷하는 바이다.
다만 , 예부터 觀相 學問으로는 80 歲까지만 정확한 개인의 生死與奪 富貴 貧賤 여부를 가늠할 뿐이다 . 세속 나이 80 歲를 넘은 者의 觀相은 안 보는 것이 正論 이다. 그러나 四柱八字 즉, 명리는 죽은 후에도 지상이든 지하든 좌우지간에 특정 개인의 遺骨만 남아 있다면 , 無限 작용을 한다는 理致다 . 다만 , 명리 학문은 태생 시점부터 적용하고 歸天世 후 明堂 즉 , 양질의 토질 내에 매장된 유골이 완전하게 散華할 시기까지로 본다 . 海印導師는 진작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나서 , 精神 修鍊 (하단전 호흡법 정법 수행 )과 命理學問과 體育 (武術 과 劍形 拳形 修鍊 )을 중요시하게 판단하고 줄곧 공부하고 練磨해왔을 뿐이다 .
즉, 觀相(생김새를 보고 그 사람의 운명의 吉凶이나 재수 따위를 판단함)이란 정확하게 간명할 줄 알면 그 사람의 전부(性格이나 大歲運 적용 판단)를 틀림없이 알 수가 있다고 말한다. 지난날 海印이 소위 천문지리학 공부에 깊이 빠져서 관상학을 접하게 되었는데, 관상 학문을 어느 정도 알게 되니까 보행 중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관상학적으로만 보여서 불편함이 컸다. 그래서 海印導師는 "선입견을 품고 세상이나 제 만물을 바라보면 제 꾀에 제가 빠져서 현명하게 세상 제 만물을 바라보고 실체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다." "처세에 지장을 초래한다."라고 판단한 후 그때까지 배운 관상학을 의도적으로 싹 무시하고서 또한 소장하면서 연구하던 '마의상법'이나 미즈노 남보꾸의 '상법전서'를 모두 불태워 버리고 나서 周易이나 命理學問을 더욱 열심히 공부한 적도 있다. 나중에 다시 관련 서적을 구매하였지만 말씀이다.~~~ㅎ~~~
관상법에 대해서 참고로 몇 마디 더 하자면 이렇다. 즉, 관상보다 骨相이 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고, 骨相보다 피부의 착색을 잘 보면 더욱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고, 着色보다 그 사람의 행동과(빠름과 느림·목소리의 웅장함과 둔탁함 등) 心相이 더욱 중요하고, 심상보다는 神相이 더욱 吉凶 判斷의 最 上位에 있다.
以下 근세 일본의 大 觀相家 <미즈노 남보꾸>翁의 소개와 “運命開拓 實踐論”을 옮겨 적는다.
爲人이 남긴 저서는 다음과 같다. 즉, 1. 남북상법전후편.2. 상법화해 3. 신상전편이해 4. 연산상법전이해 5. 상법대역변론 6. 비전화 7. 상법극의수신론 8. 개귀현론 등 또한 미즈노 남보쿠는 1757년에 태어나 75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늙어 大 邸宅을 소유하고 창고만 7개를 가진 부호였으나, 위인은 절제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음식은 보리 한 홉 반 · 술 1홉 · 반찬 1탕 1채만 고집했다고 전한다.
위인은 일본의 유명한 관상가이자 運命學者이며 思想家다. 스무 살에 칼에 맞아 죽을 운명을 어찌어찌 면한 후, 운명학을 공부하기 위해 3년 동안 이발소에서 얼굴 모양을 살피고, 다음 3년은 목욕탕에서 때밀이로 일하면서 벌거벗은 모습을 관찰했으며, 마지막 3년은 화장터에서 시체를 닦으면서 죽은 사람의 인생을 연구했다. 生前에만 3천 명이 넘는 제자들로부터 추앙을 받았으며, 성공의 지혜를 나누는 데 힘을 쏟았다고 전한다.
당대에 일본 정부로부터 "大 日本人"이란 칭호마저 받았다. 그는 10세 즈음에 부모를 잃고 삼촌 댁에서 자랐다. 10대 때에 술과 도박, 싸움질을 일삼다가 18세에 감옥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옥중 생활을 하게 되면서 동료 죄수들의 얼굴을 보니 한결같이 일반인들과 다른 점이 있는 인상들이었다. 이에 흥미를 느낀 그는 출옥 후 운명학자를 찾아가 자신의 관상을 봐 달라고 했다. 당대 일본 사회 전체에서 인정받는 관상가였다고 한다. 그의 상을 본 후 일러 주기를 “앞으로 1년 안에 劍難을 당할(칼에 맞아 죽을) 운명이라고 하면서 그 재난을 피하려면 입산수도(入山修道)하는 길밖에는 없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충격을 받고 그는 가까운 사찰로 가서 받아 주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덕망이 높으신 주지 스님이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더니 “그대는 얼굴에 殺氣가 있어 절에 들어오기엔 부적합하니, 앞으로 1년간 집에서 보리밥에 흰콩으로만 절제된 식사를 하고 나서 1년 후에 다시 찾아오라.”고 일러 주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1년간 한 끼도 거르지 않고 보리밥에 흰콩으로만 식사하는 절제된 생활을 하였다. 그런지 1년 후 그는 1년 전에 찾았던 운명학자를 다시 찾았다. 그의 얼굴을 본 운명학자는 놀라며 묻기를 “어떻게 그간에 상(相)이 바뀌었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그가 1년간 절제된 생활을 하게 된 내력을 말해 주었더니 답하기를 “절제된 생활은 운명을 바꾸고 하늘의 뜻을 바뀌게 한다”라고 일러 주었다. 그 후 그는 9년간을 뼈를 깎는 정진을 쌓아 당대 일본 최고 수준 사상가의 지위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위인이 우리에게 남긴 큰 가르침은 아마 “節制의 美學”이지 않을까 추측한다.
특정 인간의 처세 방법 중 기억할 사항을 몇 가지 기록한다.
1. 언제 어디서나 항상 몸가짐을 조심하고,
1. 매사 節制(스스로 정도를 넘지 않고 알맞게 조절하여 제한함)하고,
1. "학문이든지 체육이든지 끊임없이 추구하고 노력해나가면서 어느 경지에 이르더라도 결코 건방을 떨거나 함부로 드러내지 않고 겸손해야 한다."는 큰 가르침을 준다.
그러나 凡人은 스스로 이를 지키기에 어려움이 많으니, 인생 일백 년 세월 중, 처세의 배움에는 끝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海印導師. 合掌.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유일하게 日本人이지만, 본받아야 할 인물은 바로, 劍星 미야모토 무사시와 위 미즈노 남보꾸 觀相家이시다.
그가 내뱉은 <節制의 美學>은 살아있는 모든 사부님에게 배운 그 무엇보다도 海印導師의 생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바 있다. 그래서 위 글을 쓰게 되었다.
오늘은 그들이 극락왕생하시기를 축수 염원하면서 글을 마친다.
己亥年 丁丑月 丁丑日 丙午時를 지나면서~~~
해인동양철학원장 海印導師 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