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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풍수지리 현장 실습 강론{妖祥(요상)한 집터에 관한 回憶(회억)}

海印導師 2 3,632 2018.07.02 12:56

凶家(妖祥한 집터) 거주 경력

 

그러니까 지난 1967년 경이다. 나의 탄생지 경북 경주시 마동 987번지 소재의 약 4,000평 과수원과 논 6,000평이 채권자의 손에 넘어가 버리자, 당장 이사할 곳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같은 동네의 6XX번지(대지 약 500)의 집이 비어 있었다. 당 집은 같은 동네의 故 南虎龍 氏(6.25참전 상이용사) 소유의 집이었는데, 그 집에서 불이 자주 나는 등 흉한 일이 발생하자, 南 氏는 당 집을 비워두고 같은 동네의 뒤 편 언덕에 새로 농가 집을 신축하여 이사한 후, 빈 집터였다.

 

당시 그 집을 싼 값(약 일십오만 원)에 매수하여 海印 가족은 이사했다. 이사한 다음 해에 海印은 경주시 황오동 모처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서 千秋을 남겼다. 이하 설명하는 내용은 과학적인 근거는 없을지라도 거의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다.

 

, 그 집에서 약 육 년이 지난 시점에 海印은 고교를 졸업하고 장사를 하기 위해서 인근 도시 경주시 사정동으로 이사했다. 당시 자나 깨나 그 집에서 하루라도 빨리 떠나야 할 것 같은 正確(정확)하게 알 수 없는 某種(모종)强迫觀念(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그래서 海印은 모친에게 거듭 말씀 드려서 마침내 허락을 얻은 결과였다.

 

사건의 발생은 그 시점부터 당 집에 세를 얻어서 이사를 한 가족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1973년부터 1978년까지 6년 동안(海印의 사고를 포함하면 총 10)에 일어난 사건을 말한다.

 

맨 첫 번째 이사를 들어 온 사람은 徐某 氏(作故). 그의 가족은 현재도 같은 마동 인근에서 구멍가게를 열고 있다. 徐 氏의 장남 서00이 같은 해 교통사고를 당해서 현장에서 즉사했다. 그래서 徐 氏 가족은 현재(경북 경주시 마동 진입로 근처)의 구멍가게 터로 이사를 가 버렸다.

 

두 번째 이사를 들어 온 사람은 裵某 氏(作故). 역시 공교롭게도 그의 아들 중 장남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현장에서 즉사했다. 사건 후, 전에 세 들었던 徐氏의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그의 가족은 凶家라고 판단했는지는 몰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윗동네 탑마을로 이사를 가 버렸다.

 

세 번째로 집세 없이 이사를 들어 온 사람은 박수 무당이자 獨不將軍 崔某 氏였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그의 장남도 교통사고를 당해서 현장에서 즉사했다. 그러자 崔某 氏는 경주시 통일전 근처로 이사를 가 버렸고, 온 동네에 凶家라고 소문이 나고 이사를 들어오는 사람이 없어서 海印 가족이 경주에서 벌였던 중화요리 식당(春秋飯店)을 접고 다시 그 집으로 이사한 1978년도까지 약 이 년간 집이 비어 있었다.

 

불행은 그곳에서 그치지 않았다. 1978년도 코오롱 호텔에서 음악 관련 일을 하면서 아래채 방에서 월세를 살던 음악가 청년이 그곳에서 연탄가스에 질식사했다. 海印의 모친은 당 사건 때문에 경주경찰서로 여러 번 불려갔다.

 

불행한 사건은 그곳에서 끝나지 않았다. 먼저 기술한 南氏의 장남(남XX)이 역시 당시로 볼 때 최후에 교통사고로 현장에서 즉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 집으로 인한 가족의 불행을 피하고자 집을 신축하여 이사까지 감행했던 남씨 부부(作故)의 결행도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동안 海印은 연속한 흉한 사건을 직접 목격하면서 참 이상하기도 하다. 내 후에 반드시 기록으로 남길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사실 海印도 장남(絶對的見解라고 確言할 수 없다)이다. 그 집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던 가족의 장남 중에서 유일하게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은 衆生은 바로 海印뿐이었다.

 

그래서 그러한 믿을 수 없는 사건은 개인적으로 腦裏(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결혼하여 장남의 탄생 전에 그 집을 賣買(매매)하기 위하여 맨 처음 그 집을 소개해 준 徐某 氏(철도청 근무 직원. 作故)를 찾아가서 그에게 結者解之(결자해지)~ 형님께서 이 문제를 풀어 줘야 할 것 같습니다. 가격에 상관없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 집을 팔아 주십시오라고 그 간의 사정설명과 함께 간곡하게 부탁했다.

 

때마침 우연의 일치로, 근처에서 온천수가 나온다는 소문 때문에 그 영향으로 외지에서 투자하는 某氏에게 海印의 염원대로 장남의 탄생 전에 서둘러서 당 집을 매매할 수 있었다. 당시 위 徐某 氏가 전화로 적정가격에 계약하자는 소리를 하길래, 성동경찰서에서 근무 중 특별휴가를 내고 당일 비행기를 타고 가서 매매 건을 성사시켰다. 그렇게 속이 후련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그 때가 가장 속이 후련했다.

 

그 후 현재까지 딱 한 번 당 흉가를 근처에서 바라본 적은 있다. 왜냐하면, 비록 타인의 가족이었지만 당 집에 거주했던 사람들에게 발생한 연속적인 한 사건의 기억이 흉하고 징그러웠기 때문이다. 당시도 그 집은 비어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그래서 海印이 더욱 양택과 음택 풍수지리에 대해서 깊이 파고들었다. 이 세상일이란 어떤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발생한다는 인과관계의 등식이 성립한다. 설령 그럴지라도 불행한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는 연유는 반드시 면밀하게 살펴봐야 또 다른 불행한 사건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제언을 하면서 이만 글을 줄인다.

 

丙申年 癸巳月 己酉日 辛未時를 지나면서~~~

 

海印東洋哲學院에서 몇 字 記錄을 남기다.

 

海印導師 合掌.

 


Comments

海印導師 2019.08.18 14:08
혹시 당 집터에 대해서 궁금하거나, 직접 방문하고자 하는 풍수지리 관련 학문의 연구가가 있으면, 소개해줄 수 있고, 출장비를 부담하면, 직접 당 집터로 동행하여 안내해줄 수도 있다. 출장비는 海印導師가 차량을 제공하면, 현금 사십오만(통행료+연료비=15만원+출장비30만원)을 부담하고, 고객께서 직접 차량을 제공하면, 출장비30만원만 부담하면 된다.~~~海印導師.  拜上.
海印導師 2019.09.19 17:06
海印導師가 며칠 전 토함산 인근에 모셔진 조상님의 산소 벌초를 위해서 고향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같은 동네에 거주하시는 海印보다도 약 10여년의 연배이신 南 某(당 집터의 원 주인 남호용씨와 친척 관계임. 약 3년전에 작고) 兄嫂님을 만나서 위 집터에 대한 그간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某 兄嫂님 曰, 당 터는 그 동안(海印導師가 賣買한 정묘년 초 경부터 그러니까 약 32년 동안) 두세 사람 소유자가 바뀌고 난 후, 약 이삼 년 전에 최종 구매한 사람이 <팬션>을 몇 채 건축하였는데, 건축 도중에 작업자 한 사람이 지붕에서 추락하여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였단다. 당시 부상의 정도가 심하여 거의 식물인간이 되었단다. 그 사건이 발생한 후, 팬션의 건축도 미완상태로 <팬션 사업>도 개업하지 못한 채, 현재 빈 건물로 방치되고 있다라는 내용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南 某 兄嫂님과 대화를 나눈 곳에서 위 집터를 바라보니까, 당 터의 시커먼 색 건물 몇 채의 상단부 지붕이 보였다. 사진을 찍을 수 있었지만, 다음으로 미루고 참았다. 그러니까, 당일은 비가 제법 내렸고, 海印導師가 직접 고속도로로 차를 몰고 상경해야 하는 심리적인 負擔이 있었다. 마음 속으로 <고속버스를 타고와서 사진을 찍어서 기록으로 남길 예정>임을 작정하고 발길을 돌렸다. 진실로 끈질긴 凶家 관련 사건 사고가 진행중이다.

위에 거론한 서 모씨의 가게는 헐리고나서, 새로 지은 아담한 노란색칠한 작은 주택이 들어서 있었다. 서씨 가족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고, 현재는 외지의 사람이 이사를 와서 그곳에 거주한다고 전해 들었다. 끝.

2019.09.07. 海印導師 記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