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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 학문 說破★사주★작명★개명★용인사주★동백작명★용인개명●

海印導師 1 3,183 2019.12.13 06:16
국내 풍수지리가 韓 某 氏의 풍수지리 관련 지론 설파가 그래도 일반인이 수긍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판단 아래 일부를 인용하고, 이하 海印導師의 음양오행론과 풍수지리학문 관련 지론을 종합 거론하여 써 내린다.


즉, 풍수지리학문이란 바로, 땅을 살아 있는 생명으로 대하는 전통적 풍수지리관에 기초한다. 만물이 기(氣)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관점에서 만물 중의 하나인 땅도 지기(地氣)로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지기에 대해 음양과 오행, 그리고 주역의 논리로 체계화한 것이 바로 풍수지리 관련 학문과 사상이다. 특히 우리나라에 있어 서양의 지리(geography)가 지리의 영역을 차지하기 이전까지의 진정한 전통지리 학문은 풍수지리였다. 19세기까지 실학자들의 지리관과 동학과 같은 개벽 사상의 밑바탕이 되었지만, 일본제국주의 한반도 침략에 의해 국가권력이 식민지화되면서 풍수지리학문은 迷信으로 격하되었으며, 오히려 逆利用(대한민국 산천의 주봉 큰 바위에 산천 측량을 구실로 쇠말뚝을 박아서 將軍 穴을 傷하게 하고 민족정기를 끊어버린다는 의도된 낭설을 퍼트렸다)하였고, 이러한 외세에 의해 왜곡된 풍수지리가 제모습을 찾기 전에 다시 서양의 지리 학문에 의해 묻혔으며, 풍수지리 관련 학문은 死者를 매장하는 터를 잡는 음택풍수라는 봉건시대의 퇴물 정도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풍수지리는 인간이 일찍부터 자연 속에서 삶을 영위하기 위해 터득된 지혜에 근본을 두고 있다. 특히 농경을 시작한 후부터 작물의 재배와 성장에 관계되는 땅의 성격과 분포의 차이를 기의 차이로 이해하면서 풍수지리는 이론적 토대를 이루게 되었다. 여기에 관련 문화를 전달한 이웃나라 중국의 春秋戰國時代 이후 氣의 변화와 動靜을 음양으로 파악하는 陰陽家의 사상적 성장과 投影이, 인간의 개별 경험적 수준에 머물던 氣(천기와 지기와 인기를 포함한다)에 대한 인식을 학문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렸으며, 이후부터 풍수지리서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비·눈·바람 등의 기후 현상, 토양, 수분, 지형, 생태계 내의 물질 순환 등 모든 자연현상을 氣의 작용으로 파악"했다.


현존하는 풍수지리서 중에서 최고(最古)의 것으로는 동진(東晉)의 곽박(郭璞)이 지은 〈금양경 錦襄經〉이다. 한반도에서도 일찍부터 땅에 대한 氣의 인식이 발달했으나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여 학문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땅에 대한 독자적인 인식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삼국시대 이후 중국으로부터 풍수지리가 전래한 후에도 중국과는 다른(異) 한반도인 방식의 독특하면서 독자적인 풍수지리 이론과 체계를 확립하는 국면으로 연구하고 발전시켰다. 특히 고려 시대에는 우리 韓半島人의 독자적 풍수지리 서적이 만들어졌다고 전한다.


統一新羅時代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동외산선문(桐畏山禪門)의 도선(道詵)이라는 禪僧에 의해 한반도 풍수지리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도선의 가장 주목되는 점은 비보사상(裨補思想)으로서 그것은 중국과 다른 한반도 인의 독특한 풍수지리 사상이다. 즉, 주어진 땅의 지기에 의지에서 살 뿐만 아니라 나무를 심거나 가산(假山)을 만들고 사찰과 탑 등의 입지를 통해 적극적으로 땅의 지기를 인간의 삶과 조화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비보 방책>으로서 한반도 풍수지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고려 시대에는 비보 문제를 전담하는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비보와 같은 땅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는 고려 시대 풍수지리에서 地氣衰旺과 그에 따른 국도의 遷都 問題를 제기하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이후 조선 시대의 풍수지리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시작되었다. 고려의 도읍인 개성을 벗어나기 위해 계룡산·모악산 등과의 비교를 통해 결국 최종적으로 한반도 중간 지점에 있는 한양이 도읍지로 선정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건국 후에 새로운 도읍 선택에 골몰한 것은 고려 시대 문종·숙종·예종·공민왕 등이 모두 풍수지리 논리를 당시 정치개혁에 이용하려 했던 전통을 이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역사적인 관련 사건으로는 묘청과 김부식의 <서경 천도설> 관련 반란사건과 진압사건이 약 일년 이개월 동안 진행한 적도 있다.


이조 初 태조는 왕조의 정통성 문제를 민중들의 사고 속에 깊이 뿌리내린 풍수지리를 이용해 左顧右眄한 것이다. 즉 地氣가 왕성한 한양에 새로운 나라를 세워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 앞날에 대한 기대를 심어주어 신흥왕조 창건의 정당성과 정치적인 안정을 도모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성종 이후 문물이 안정되면서 개혁적 풍수지리의 사상성은 점차 몰락해버렸고, 풍수지리 사상은 좋은 터를 골라 가문과 개인의 부와 권력을 탐하는 수단으로 관련 학문을 이용함으로써 풍수지리는 당시 사대부와 일반 민중의 이기적인 집터와 묘터 잡는 잡술로 여겨지게 되었다. 조선말 실학자 군에 의해서 타락한 풍수지리를 비판하고 건강한 풍수지리관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가 제기되었으나, 외세의 침략으로 결실을 보지 못한 채, 풍수지리는 오늘날에도 저속한 옛 관습을 깨트려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임을 개탄한다.


풍수지리는 기본적으로 지기로서 이루어진 살아 있는 땅에 인간이 어떻게 잘 조화해서 살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땅은 좋고 나쁜 것이 없고 스스로 그러한 모양으로 존재하고 있다. 여기에 인간이 조화해서 살아야 한다. 인간이 조화하기 어려운 땅이 인간의 눈에는 좋지 못한 땅으로 보일 뿐이다. "자연 그 자체로서는 선악의 판단에 구애되지 않는 것이다." “땅과 조화할 수 있는 기반은 인간이 땅의 기를 느껴서 자신과 잘 맞는 장소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한 시도가 바로 풍수지리학문의 필요성과 다양한 이용성의 핵심 요체라고, 海印導師는 전체를 살핀 후 명확한 개인적인 판단을 내린다.

그런데 인간은 문명을 만듦으로써 점차 자연과 멀어졌고 이에 따라 인간의 본능적인 능력으로서의 기감(氣感) 능력은 상실되었다. 기감이 상실된다면 풍수지리의 이론체계는 쓸모가 없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이론이 만들어졌다. 직접 땅의 기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땅의 여러 가지 단서들을 가지고 직접적으로 지기를 파악하려는 모든 노력이 풍수지리의 이론을 형성하고 있다. 다만, 오늘날 풍수지리 이론의 전반적인 면모를 냉정하게 살피자면 이렇다. 즉, <인간의 눈으로 본 물상에 대한 판단 기준을 땅의 원천적 기질성으로 곡해해서 표현하는 등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관련 종사자 중 현실추구성 보다는 허풍을 즐기는 下手 風水地理家의 利己的인 관련 풍수지리 학문 통찰 미흡함>에 있다.


海印導師는 옛날 초등 중등 고등학교에 다닐 때, 개인적으로 사회와 지리 과목을 가장 좋아했다. 물론 대학교에서는 법률학문을 전공했다. 그때부터 원초적인 관심이 많았던 분야가 바로 풍수지리 방면이었다. 오늘도 글 정리를 하면서 관련 내용을 간추려서 올린다.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이렇다. 즉, 풍수지리도 인간이 유익한 터전에서 좀 더 오랜 기간 발복을 받자는 인간 의지가 뭉쳐져서 학문화되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불가의 인연 법칙이 냉정하게 적용된다. 무릇 인연이 있는 자는 그 학문상 관련되는 이익을 취할 활용성을 추구할 것이요, 아닌 자는 그냥 지나치면 될 뿐이다. 끝.


海印導師 合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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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海印導師 2019.12.13 13:49
양택풍수지리 관련 학문은 양택과 음택으로 나눈다.

陰宅은 山地 보유 여부와 一山一明穴이라는 원칙에 의거해서 장소 선정이 어렵기 때문에, 근래에 와서는 범국민적으로 火葬을 선호하는 연고로 사라져가는 埋葬文化로 인하여 음택 관련 길지선호도 문의도 줄고, 점점 퇴색하는 학문적 영역으로 변하고 있다.

그렇지만, 인간의 생존 주거문화의 효용성과 활용성때문에 주택 건축과 사무실 건축과 예술작품 건축에 정통 팔방론과 정법 건축방위론을 참고한 적용 설계는, 풍수지리 사부님 남헌 이준기님의 8기 문하생으로 건축가 박시익 건축가 덕분에 조용하게 지켜지고 있는 점은 매우 밝고 鼓舞的인 현상이라고 본다.

海印導師. 記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