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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養命之本·經濟★결혼궁합·택일★용인철학관★해인동양철학원●

海印導師 8 607 2022.10.26 17:07

 

경제란 국가적인 견해에서 말하는 것이고 소시민에게는 그냥 “재물의 향방” 정도가 맞을 것 같기도 하지만, 현재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여러 국가의 “디폴트”를 우려하는 후 폭풍으로 세계 증시는 추락을 거듭하고 국내의 경기도 불황으로 치닫고 소비심리가 줄어들어 경제 패닉 심리상태에 접어드는 시점에 바로 다가오는 인간사회의 경제라는 가치를 추론해 봄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옛날부터 “적정한 재물은 養命之本”이라고 칭하면서 특정 인간들이 그것을 취득하기 위하여 생사를 걸면서 서로 싸우고 쟁취하고 정도가 심하면 살생과 집단 살육도 마다하지 않는, 그야말로 재화와 재물이란 인간생활에서 영원하게 풀 수 없는 소중한 가치판단이지만, 피침탈자의 빼앗기는 입장에서는 경제적인 회복을 위한 영원한 악업과 복수의 실행이라는 “큰 숙제”로 남아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후세의 경제 관련 철학자 벤담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란 명제를 내세웠고, 아담 스미스는 경제문제를 해결코자 “국부론”을 저술했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한답시고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아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저술하여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고 자본주의를 능가하는 사회체제로의 탈바꿈이 경제해결책이라고 하면서 그의 이론이 소비에트 연방 공산주의의 모태가 되었지만, 역사의 냉엄한 심판 앞에서 그 이론들은 오직 책에서 말하는 이론뿐으로 실제로는 1991년 12월 “벨라 베자 조약”에 의해 소비에트 연방은 해체되었으며, 소련은 연방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의 경제방식을 일부 채택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인간사회에서 그 어떠한 경제이론과 경제정책도 지구상에 생존하는 모든 국가나 집단과 사회의 인간을 동시에 만족시키고 충족시킬 수 없는 한계를 철칙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말해서 경제란 그 시대의 조류와 흐름에 순응하여 적절하게 최대다수의 인간에게 최소한의 생존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으면 그 타고난 본분을 다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엄밀하게 말해서 "부의 축적이란 바로 타인의 재화를 강제나 다른 수단으로 빼앗아서 자신의 지배권역으로 옮기는 능동적인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세계경제의 흐름은 모든 분야가 거의 비슷하지만 국제적으로 엄청난 네트워크로 상호 연결되어 특별하게 한 국가만 부를 축적하고 다른 한 국가는 부도를 면치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 국가가 경제적으로 부도가 나서 “채무 불이행”상태가 벌어지면 그 연결 고리에 물리고 물려서 연쇄적으로 도미노 “디폴트 사태”가 발생하게 되어 세계경제가 연쇄적으로 침몰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지난 날 그리스와 이태리의 국가부도 위기에 독일과 덴마크가 난리법석을 부린 적이 있다.


물론 미국의 세계경찰권 행사의 반대급부로 강행되는 “달러화의 세계 기축통화(-key currency, 基軸通貨-)의 세력에 맞서서 ”유로화“ ”파운드화“ ”엔화“ ”위안화“등이 세계경제의 거래단위로 그 힘을 균분하면서 점점 세력을 키워가고 있다. 그렇지만 사실 경제적인 문제의 해결책은 실행은 어렵지만 이론은 간단하다. 즉, 전쟁을 일으켜서 거대한 지하자원이나 경제력을 지닌 한 국가의 경제력을 빼앗아서 다른 국가들이 균분하여 나누면 침략하거나 약탈이 주체가 된 국가는 해결된다. 그러나 오늘날 현실적으로 그렇게 실행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뒤로 숨어서는 알 카에다나 이슬람무장단체 다에시 박멸을 목표로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독일 등 군사강대국의 국소지역 전쟁이 그 중 하나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방법을 현재 시점 壬寅年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서 실행중이다.


오늘날에는 핵무기를 보유한 강대국 간의 경제침략 전쟁이 마침내 핵전쟁으로 확산될 경우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에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는 국가에 대한 공갈과 협박의 수단으로 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한계에 직면해 있다. 만약, 핵무기 사용으로 국지전쟁 이외의 제3차 세계대전 확전은 곧 현존 인류를 파국으로 몰고 마침내는 "호모 사피엔스" 다시 말해, 휴먼(Human) 종족 멸종의 위기까지 올 수 있어 함부로 일으키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볼 때, 핵무기 사용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용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핵폭발의 참혹한 구경(?)으로 강대국이든 약소국가이든 호모 사피엔스 종족이 다함께 만족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염원을 기린면서 당 글을 줄인다. 끝.


海印導師 合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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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印導師 2022.10.27 08:16
[ 董仲舒 ]  동중서
유교 국교화의 길을 연 중국의 학자 관료

출생 - 사망
B.C. 170(?) ~ B.C. 120(?)
“동중서는 학문을 없애버린 진나라를 잇는 한나라에서, 6경(經)이 지리멸렬해진 시기에 태어났다. 휘장을 내린 채 열심히 학문을 닦아 큰 사업에 마음을 기울였다. 훗날의 학자들이 통일된 길을 걷도록 하고, 모든 유학자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후한의 학자 유흠이 동중서를 평가한 대목이다.


두 번째의 천하통일, 어떻게 지킬 것인가
 이미지 1
한나라는 ‘초한대전’을 거쳐 중국을 다시 한 번 통일했다. 그러나 진나라의 경험이 있었기에, 그 통일을 오래 유지하려고 많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나라의 강제적인 군현제가 중앙행정의 과중함과 지방세력의 반발을 가져왔다고 보고, 옛 봉건제와 절충하여 지방세력들의 독립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군국제’를 실시했다. 또 진나라 때의 사상 탄압 대신, 여러 사상과 학파를 육성하고 각자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정책을 썼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한나라 초기를 주름잡은 학파는 도가(道家)에서 비롯한 황로학(黃老學)이었다. ‘오랜 전란에 지친 백성들을 쉬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무위(無爲)를 정치의 기본원칙으로 삼고 관리는 백성들에게 가급적 간섭하지 않도록 하는 도가의 사상이 많이 채택된 까닭도 있었고, 왕실 사람들이 불로장생 등을 말하는 도가의 술사들에게 관심이 컸던 까닭도 있었다. 한편 공자에서 비롯되는 유가(儒家)는 진나라 때 분서갱유를 겪었다고는 해도, 아직도 중국의 최대 학파 중 하나의 저력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한고조 유방의 책사였던 육가는 “천하를 다스리려면 인의와 예악에 의존해야 한다”고 말했고, 숙손통은 유교적 예악을 한고조가 정식 채택하게 했으며, 한문제 때는 가의가 [과진론]에서 “진나라는 힘으로 억누르고 형벌로 위협하는 정치를 해서 일시적으로 천하를 굴복시켰으나 원한과 반발이 일어나 오래 보존하지 못했다. 우리 한나라는 예의와 도덕에 따라 백성을 어루만지는 정치를 해야 한다”며 유가적 이상을 주장하는 등 유가적인 사상이 중심에 떠오를 조짐이 계속 나타났다.

기원전 141년에 즉위한 한무제의 시대에는 이런 조짐이 본격화되었다. 그는 조관, 왕장 등 유학을 공부한 중신들을 가까이하며, 명당을 세워 본격적으로 유학을 가르치려는 계획을 세웠다. 비록 황로학을 독실히 따르던 두태후의 반대에 부딪쳐 명당 설립은 중지되고 조관과 왕장은 처벌을 받고 자살했으나, 유학을 배운 사람이면 황제의 눈에 들어 관직에 나갈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유학을 전반적으로 익히기보다 하나의 경전에 힘을 쏟아서 일가를 이루는 사람이 많았다. 유학의 저변이 좁고 학술이 통일되지 않아서 그랬을 듯한데, 가령 신공은 [시경]을, 복생은 [서경]을, 고당생은 [예기]를, 전생은 [역경]을 전공해서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결국 유교가 중국 문명의 핵심에 자리잡는 길을 터주게 될 사람은 [춘추]를 전공한 동중서였다.

유교 국교화의 장본인이 동중서라고?

한무제. 그는 동중서의 건의에 따라 유교를 진흥했다고 한다. <출처: Wikipedia>

동중서는 지금 허베이성의 광천(廣川) 출신이라고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이 광천국(國)을 말하는지, 광천현(縣)을 말하는지가 불분명해서 허베이성에는 동중서의 고향이라고 내세우는 현이 셋이나 된다. 그 생몰연대 또한 불분명하여, 출생연도에 관한 여러 설 중에서 가장 일찍인 것은 기원전 198년, 사망연도로 가장 나중인 것은 104년이다. 단지 그가 기원전 87년에 죽은 한무제보다는 일찍 죽었고, 한고조의 치세 때 태어나 무제까지 다섯 황제의 치세에 걸쳐 살았다는 점이 이런저런 문헌에서 나타날 뿐이다.

그는 3년 동안 장막에 들어앉아 공부에 몰두하느라 자기 집의 채소밭이 망가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행동 하나하나를 예법에 들어맞게 하여, 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고 여러 제자를 거느리게 되었다. 그는 제자 중에 선배가 후배를 가르치도록 했으므로 신입생은 꽤 시간이 지난 뒤에도 스승의 얼굴을 한 번 보기 어려웠다고 한다.

동중서는 한경제(漢景帝) 때 박사의 직위를 받아 처음으로 관직에 들어가지만,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린 것은 그 다음인 한무제 때다. 무제가 정치의 올바른 지침에 대해 널리 대책을 써 올리도록 한 데 응하여 동중서가 “천인삼책(天人三策)”을 올린 것이 채택된 것이다. 이는 한무제가 유교를 본격적으로 장려하여 오경박사를 두고 명당과 태학을 설립하는 등 유교 국교화의 길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이는 일부 의심을 받기도 한다. 오경박사를 두는 등의 유교 진흥 정책이 동중서의 건의의 결과였다는 문헌적 근거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천인삼책 자체도 동중서의 동시대인으로서 처음 동중서의 전기를 쓴 사마천의 [사기]에는 보이지 않으며, 후한 시대의 반고가 쓴 [한서]에 비로소 나타난다. 사실 [한서]에는 동중서를 별도의 열전으로 다룬 반면 [사기]에서는 “유림열전”에서 여러 유학자들과 한데 묶어 다루는 것을 볼 때, 동중서가 당대에 한무제에게 그렇게 존중받았을지 의문이 든다. 동중서가 중앙에서 어떤 중책을 맡았다는 기록은 전혀 없으며, 강도국과 교서국의 재상을 지냈다고만 되어 있다. 그런데 강도국을 다스리던 강도이왕 유비(劉非), 교서왕 유단(劉端)은 모두 포악하고 방탕하기로 이름난 사람들이었다. 그런 곳에서 동중서가 자신의 유교적 이상정치를 펼쳐볼 수 있었을까? 사실 한무제가 유교를 진흥했다지만, 그는 진시황처럼 불로불사를 추구하고 법가의 계통을 이은 장탕 등의 인물을 중용하는 등 아직도 유교에만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사상을 자유롭게 취하고 있었다. 천인삼책에서 동중서가 “도가나 법가 등 다른 학술은 이단이므로 억압할 것”을 건의한 이후 중국은 오직 유교만을 중심에 세우게 되었다고 하지만, 동중서가 그런 계기를 제공했다고 해도 그의 생전에는 실현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동중서의 공직 인생도 오래지 못했다. 그는 역시 [춘추]를 전공했지만 승상까지 이르렀던 공손홍의 질시를 받았으며, 포악한 교서왕의 재상이 된 까닭도 공손홍의 농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교서국에 있을 때 요동 소재의 한고조의 묘가 불에 타자 동중서는 그 사건을 설명하는 글을 썼는데, 위에 올리지는 않고 둔 것을 [역경] 전공 박사였던 주보언이 훔쳐 자신의 글처럼 올렸다. 그러나 동중서의 제자였던 여보서가 그것이 사실 스승의 글인 줄도 모르고 “터무니없으며 불경스럽다”고 탄핵해 버렸고, 일의 전말이 밝혀지자 한무제는 동중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동중서는 얼마 후 사면을 받아 목숨을 건졌으나, 그 뒤로는 집에 들어앉아 죽기까지 학문과 교육에만 열중하며, 다시는 재이(災異)를 논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마천은 그의 라이벌이었던 공손홍에 대해서는 따로 열전을 마련하여 그의 정치적 비중을 인정했다. 그러나 동중서의 기사를 마무리하며 “한나라가 일어나 다섯 임금을 거치는 동안 [춘추]에 능통한 사람은 오직 동중서뿐이었다.”라고 하여, 학문에 있어서는 동중서가 공손홍보다 뛰어났음을 밝혔다.

명분에 따라 둘로 나뉘는 세상

음과 양의 구분을 남녀의 역할에 빗대어 표시한 그림

그러면 생전에는 그리 높은 지위에 이르지도 못했고, 결코 “모든 유학자들의 우두머리”로 인정받지도 못했던 동중서가 어째서 후대에는 큰 영향력을 얻고, “유교 국교화의 장본인”으로 여겨지게 되었는가?

그것은 먼저 그의 전공이 다름 아닌 [춘추]였고, 그 중에서도 “공양학”을 연구했기 때문이다. [춘추]는 공자가 지은 역사서이지만 일반적인 역사서와는 달리 철저한 사실의 기록보다는 사실의 이해를 우선한다. 유교적인 도덕을 기준으로 인물과 사건을 평가하여, 명분이 선다고 여겨지는 쪽은 높이고 그렇지 못한 쪽은 낮춘다. 한나라를 이은 삼국시대의 경우 군사력, 경제력, 문화수준 등 모든 면에서 위나라가 삼국 중 으뜸이었으나 송나라 이후에는 촉한을 정통으로 간주했는데, 위나라는 불의한 방법으로 나라를 빼앗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춘추의 필법’을, 주자로 존중받게 되는 주희는 이렇게 설명했다. “[춘추]의 대의란 난신을 폄하하고 적자(賊子)를 성토하며, 중화를 가운데 두고 오랑캐를 주변으로 내치며, 군주를 귀하게 여기고 신하를 천하게 여기는 것일 따름이다.”

따라서 [춘추]의 명분론은 세상을 양과 음으로, 위와 아래로, 정통과 이단으로 구분하며, 위계질서를 세운다. 그렇게 해야 세상이 비로소 바로 돌아간다고 본다. 이는 “자연 그대로 살면 가장 좋고, 도덕이니 예의니 하는 것을 따지면 따질수록 힘들어질 뿐이다”라고 보았던 도가-황로학의 관점과는 정반대였다. 위계적 이분법은 신하는 군주에게(아무리 어리거나 무능한 군주라 해도), 오랑캐(아무리 물질문명이 뛰어나고 국력이 강해도)는 중화에게 복종해야 명분에 맞고 도리가 통한다고 여겼을 뿐 아니라 남자와 여자, 노인과 젊은이, 문(文)과 무(武) 등에도 그런 구분을 엄격히 지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황제의 권위를 높이고 천하에 두루 군림하고자 했던 황제들에게, 또 한편으로는 다른 제자백가를 이단으로 몰고 독점적인 지위를 확보하려고 했던 유학자들에게 이런 [춘추]의 학문은 매우 유용했을 것이다. 더욱이 동중서의 춘추공양학은 역사 발전을 난세, 승평세, 태평세의 3단계로 구분하였다. 따라서 명분을 바로잡고 교화에 매진할수록 천하는 더욱 빨리 하나의 집이 되며, 모두가 태평세월을 누리게 된다고 여겼으므로 학문의 통일과 유교적 문치주의의 진흥은 더욱 중대한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하늘과 사람은 하나로 통한다”

“천인삼책”과 [춘추번로]를 통해 동중서가 후대에 미친 또 하나의 주요 영향은 이른바 “천인감응설”이다. 이는 자연현상과 사회현상 사이에는 마치 거울에 비친 듯한 상관관계가 수립된다는 설이다. 동중서는 음양가의 이론을 유교에 채용하여 세상 만물은 모두 음양오행의 규칙에 따른다고 생각했다. 목금화수토(木金火水土)의 오행은 동, 서, 남, 북, 중앙의 오방(五方), 청, 백, 적, 흑, 황의 오색(五色) 등 물리뿐 아니라 인, 의, 예, 지, 신의 오덕(五德) 등 사회적 질서도 규율한다. 원래 춘추시대의 유가는 자연이나 초자연의 문제를 거의 논하지 않고 사회적인 문제만을 다루었고, 음양가는 사회적 문제보다 자연의 물리에 집중했는데 동중서는 이 두 관점을 하나로 합쳐버린 것이다. 때로 그런 결합은 억지로 끼워 맞춘 듯 여겨지는 결론에도 이르렀다.

“농민은 곡식을 다루므로 목(木)이며, 백성의 대부분은 농민이니 역시 목이다. 백성이 반란을 일으키면 관리들이 그 우두머리를 붙잡아 처형하여 진압한다. 관리는 금(金)이며, 금은 목을 이기기(金克木) 때문이다. …… 임금은 중앙에 거처하므로 토(土)이다. 임금이 무도하면 온 백성이 일어나 임금을 내쫓게 된다. 목이 토를 이기는(木克土) 것이다”([춘추번로])

그처럼 일일이 따지다 보면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도 많기 때문에 천인감응설이 언제나 철저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원칙은 유학자들 사이에서 계속 전해졌고, 유교적 정치사상에도 반영되었다. 조선시대의 왕들이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과인이 정치를 잘못해서 우주의 질서가 어긋났기 때문”이라며 반성하는 뜻에서 반찬을 줄이고 음악을 듣지 않았던 것도 이 천인감응설에 근거한 관행이었다.


베이징의 천단기년전. 명나라 때 세워진 것으로 황제가 하늘에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린 곳이다. <출처: Wikipedia>

오늘날 동중서를 생각한다면 이렇다.

이처럼 동중서의 사상은 수직적이고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정당화했으며,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비과학적인 관념에 사로잡혀 자연과 사회를 혼동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름대로 장점도 있었다. 춘추의 필법에 근거한 정치론은 지배계급이 사치와 방종에 빠지지 않고, 도덕 원칙과 대의명분에 맞는 정치를 하도록 채찍질했다. 천인감응론은 자연과 사회는 잘 조화가 이루어진 세계이며, 따라서 과도한 토목공사를 벌여 산과 강의 모습을 바꾸거나 특정 계층에 부를 집중시켜 조화를 깨트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위정자들에게 심어주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일종의 인도주의와도 연결되었다. 옛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사형은 반드시 가을에 집행했는데, 계절 중에 금(金)에 해당하는 가을에 마치 낙엽이 떨어지듯 생명이 스러지게 해야, 오행의 조화를 깨트리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가뭄이나 홍수가 있으면 가벼운 범죄자들을 사면하고 심리 과정에서 억울함이 없도록 조심했는데, 억울하게 처벌받은 사람들의 울분이 음기가 되어 양기를 침범함으로써 천재지변이 발생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동중서가 기초를 잡은 옛 동양의 사상체계에 비해, 오늘날의 우리는 훨씬 복잡하고 현실적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 또한 보다 합리적인 사회질서 속에서 자유와 평등을 누리고 있다고 자부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그 시대의 사람들보다 더 행복할까. 그리고 지구의 입장에서 보자면 어느 사상체계가 더 해로울 것인가.

[네이버 지식백과] 동중서 [董仲舒] - 유교 국교화의 길을 연 중국의 학자 관료 (인물세계사, 함규진)
海印導師 2022.10.30 18:16
https://www.youtube.com/watch?v=0rSvlDQn36o  최근 기존의 물리학 이론을 송두리 째 바꿀 놀라운 발견이 국내연구진에 의해 나왔다
海印導師 2022.11.02 11:34
https://www.youtube.com/watch?v=zxJXknV4RSo  속보 북한인 5만명 극동러시아 이주 러시아 부총리 폭탄발언 북한에 극동러시아 떼어주는셈 강력경고나오는 이유
海印導師 2022.11.03 17:50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돌아간다. https://www.youtube.com/watch?v=ErWEq8sZGGU 우주(시공간) 밖은 어떻게 생겼을까?
海印導師 2022.11.03 17:57
https://www.youtube.com/watch?v=w8EMnN6GomI  초끈이론이 말하는 우리의 우주가 생긴 이유. 초끈이론 4편
海印導師 2022.11.03 18:06
https://www.youtube.com/watch?v=IBf4hzmO55Y  우주가 10차원인 이유와 초끈이론의 문제. 초끈이론 3편
海印導師 2022.11.03 18:12
https://www.youtube.com/watch?v=APH-3tNRErg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충돌한 이유. 초끈이론 2편
海印導師 2022.11.03 18:18
ttps://www.youtube.com/watch?v=kKRzdv8qRFQ  초끈이론이 이런입자가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한다고? 초끈이론 1편